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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돈 천국' 오명 벗나…스위스, 자산 실소유주 등록 추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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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수도 베른의 의회 전경. 로이터=연합뉴스

스위스 수도 베른의 의회 전경. 로이터=연합뉴스

전 세계 ‘검은돈의 천국’으로 여겨지는 스위스가 자산의 실소유주를 명시하는 내용을 포함한 강도 높은 금융 개혁안을 도입한다고 30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 현지 매체 르 탕이 전했다.

매체들에 따르면 이날 카린 켈러 서터 스위스 재무부 장관은 금융 개혁법안의 초안을 공개하면서 “세계적 수준의 안전한 금융·경제 중심지로서 스위스의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연방 정부는 현 제도를 강화하려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스위스는 돈세탁과 탈세, 제재를 회피하려는 전 세계 범죄자와 조직들에 노출돼 있다”면서 “이번 제도 개선으로 스위스 금융 시스템의 무결성과 경쟁력을 강화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르 탕은 이에 대해 “서터 장관이 스위스의 자금 세탁 방지 제도에 구멍이 있다는 것을 언론 앞에서 인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초안엔 자금 세탁의 주요 통로가 되는 법인들의 실제 소유주를 기록하는 ‘연방 등록부’를 도입하는 것이 포함됐다. 일종의 실명 등기 제도인데, 유럽 국가 가운데 이 제도를 운용하지 않는 나라는 지금까지 스위스가 유일했다. 이 등록부는 일반에 공개되진 않지만, 경찰이나 은행·변호사·회계사 등이 요청할 땐 열람이 가능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지난 2016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자신의 측근 가운데 한 명인 세르게이 롤두긴에게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지난 2016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자신의 측근 가운데 한 명인 세르게이 롤두긴에게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에 더해 은행과 회계사, 변호사 등에 대해 고객의 신원 확인, 자금 세탁 심사 의무가 강화된다. 의심 사례를 발견했을 땐 당국에 보고해야 한다.

또 모든 부동산 거래에 실사를 도입하고, 금이나 다이아몬드 등 귀금속·보석류를 현금화할 때 심사 기준도 강화했다. 지금까진 10만 스위스프랑(약 1억 5000만원) 이상일 때만 자금 세탁 심사를 받도록 했다면 앞으로는 1만 5000스위스프랑(약 2200만원)으로 기준을 낮추기로 했다.

연방 정부는 내년 초 도입을 목표로 오는 11월까지 의회에서 협의 과정을 거칠 예정이다. FT는 그러나 새로운 규제가 금융권의 '자체 규정'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강제 조치가 아니란 점을 한계로 지적했다. 은행과 변호사 단체들의 로비에 밀려 실제론 한층 후퇴한 법안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FT에 따르면 스위스 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국외 자산은 약 2조4000억 달러(약 3176조 280억)에 이른다. 스위스는 고객의 비밀을 철저히 보호하는 ‘비밀주의 은행 체계’로 세계 각국 부호들의 금고 역할을 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 정권의 눈을 피해 유대인들이 돈을 숨겨 놓은 곳이 스위스 은행이었다. 또한 히틀러의 금고 역할도 했다.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스위스는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비밀 금고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에 스위스는 지난해 3월 푸틴과 측근 367명에 대한 자산 75억 스위스 프랑(약 11조 2881억원)을 임시 동결하는 등 제재에 동참했다. 스위스가 오랫동안 고수해 온 중립 정책에서 한발 물러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그러나 “스위스가 동결한 금액은 스위스 계좌에 예치된 러시아 고위 관계자들의 총자산 규모에 턱없이 못 미친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베른 주재 주요 7개국(G7) 대사들은 지난 4월 “스위스 정부가 이중 국적자나 간접적인 실소유권을 보유한 러시아인들의 자산은 동결하지 못했다”며 “우리는 이 같은 법적 허점이 스위스의 평판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고 우려한다”는 서한을 연방 정부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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