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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와 사색] 낮은 곳을 향하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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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4호 30면

낮은 곳을 향하여
정호승

첫눈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내린다
명동성당 높은 종탑 위에 먼저 내리지 않고
성당 입구 계단 아래 구걸의 낡은 바구니를 놓고 엎드린
걸인의 어깨 위에 먼저 내린다

봄눈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내린다
설악산 봉정암 진신사리탑 위에 먼저 내리지 않고
사리탑 아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의 늙은 두 손 위에 먼저 내린다

강물이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가야 바다가 되듯
나도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가야 인간이 되는데
나의 가장 낮은 곳은 어디인가
가장 낮은 곳에서도 가장 낮아진 당신은 누구인가

오늘도 태백을 떠나 멀리 낙동강을 따라 흘러가도
나의 가장 낮은 곳에 다다르지 못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도 가장 낮아진 당신을 따라가지 못하고
나는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다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창비 2017)

강원도 태백시 도심 한가운데에는 황지라는 이름의 연못이 있습니다. 이곳의 차고 맑은 물은 낮은 곳을 찾아 천삼백 리를 흘러 바다와 만납니다. 이 물길의 이름은 낙동강입니다. 그런가 하면 태백시 함백산 자락에는 검룡소라는 연못도 있습니다. 석회암반을 뚫고 서쪽으로 천천히 향합니다. 이 물길은 한강이라 부르고요. 생각해보면 변화와 갱신의 아름다움은 낙차에 달려 있는 듯합니다. 낙차가 없다면 그 무엇도 없겠지요. 일교차가 점점 커지는 요즘, 아침저녁으로는 가을을 살고 한낮에는 여름을 살아갑니다. 부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높아지기를, 내 목소리와 행동은 낮아지기를 바랍니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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