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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 차이나, 피크 코리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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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우리에게는 흔히 ‘IMF 사태’로 통용되는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는 세계 경제학계에서는 ‘아시아 금융위기’로 불린다. 전 세계적 위기로 전이되지 않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위기의 원인에 경제 후발 주자로서 아시아 국가의 발전 특성이 결부됐다는 의미도 있다. 이런 시각의 대표적 경제학자가 당시 위기를 예견했던 미국의 폴 크루그먼이다.

부동산·부채 주도 성장 중국 경제
효율 낮은 화차에 석탄 퍼부은 격
우리 경제도 생산성에 의문부호
경제활력 되살릴 큰 그림 나와야

크루그먼은 ‘총요소생산성 정체’에서 위기의 징후를 읽었다. 총요소생산성은 노동, 자본 같은 단일 요소로는 파악하기 힘든 복합적 생산성을 말한다. 기술 혁신, 노사·경영체제, 법·제도 등 한 국가의 ‘보이지 않는 능력’이 총체적으로 반영된 개념이다. 아시아 국가들은 노동력과 자본력 투입을 늘려 빠른 성장을 이뤄냈지만, 어느 순간 한계에 봉착했다. 석탄으로 달리는 화차에 비유해볼 수 있겠다. 석탄을 퍼넣으며 속도를 내던 화차가 석탄이 떨어지자 뚝 멈췄다. 세상은 낡은 증기 기관 시대에서 고속 열차 시대로 이미 바뀐 걸 몰랐다.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크루그먼의 지적은 아직도 유효할까. 유감스럽지만 그렇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이번엔 중국이다. 중국은 90년대 후반의 아시아 금융위기를 피했다. 시장은 개방했지만 금융의 문은 닫아걸었기 때문이다. 위기를 비껴간 중국은 한국이 경제위기 충격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데 든든한 시장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그동안 누적된 모순과 문제점이 이제 슬슬 나타날 조짐이다. 헝다(恒大)나 비구이위안(碧桂園) 같은 부동산 위기가 그 현장이다.

2015~19년 중국의 총요소생산성 평균 증가율은 OECD 국가보다 1.8%포인트나 낮았다(한국경제연구원). 덩치는 커졌지만 효율성이 한참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2008~21년 중국의 인프라 및 경질 자산(hard asset)에 대한 투자는 GDP의 44%. 전 세계 평균 25%, 미국 20%의 배 수준이다. 중국 경제는 석탄을 퍼부어 질주하는 화차였던 셈이다. 점점 세지는 미·중 갈등은 중국에 불리한 요소다. 미국에 맞서 자립경제를 추구할수록 기술혁신이 더 어려워지는 딜레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첨단기술 약소국의 비애다. 중국의 GDP 대비 수입 비중이 1%포인트 줄어들면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은 0.3%포인트 감소할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

그렇다고 중국 경제가 당장 무너져 내릴 부실 건물은 아니다. 부채 비율이 높거나 유동성이 떨어지는 업체에 대한 은행 대출을 막은 ‘3개 레드라인’(三道紅線)이 부동산 위기를 불렀지만, 중국은 의외로 느긋하다. 기준금리 격인 대출우대금리(LPR)도 찔끔 내리는 데 그쳤다. 최근 공산당 기관지 추스(求是)가 한동안 사라졌던 시진핑 주석의 정치구호 공동부유(共同富裕·함께 잘살자)를 다시 꺼낸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위기가 어렵긴 하지만 관리 가능하다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은 최근의 경제 상황을 ‘기복 있는 발전, 곡절 있는 전진(波浪式發展, 曲折式前進)’의 과정이라고 정리했다.

중국 경제가 정점을 쳤다는 ‘피크 차이나’론은 섣부르다. 최근 중국 경제 난맥을 ‘차이나 런’의 신호로 해석하는 것은 성급하다. 중국 같은 거대 경제가 중진국까지 오른 이상 성장률 하향은 불가피하다. 중국 시장에서 우리 상품의 위치가 과거만 못 한 것이 중국의 위축 때문인지, 우리 상품의 경쟁력 저하 때문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아직도 우리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최대 시장이다.

‘중국의 40년 호경기 성장 모델’이 끝났다는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사에 등장한 전망치 중 하나가 향후 수년간 중국 성장률이 4% 미만일 것이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예측이다. 중국을 불안한 눈으로 보는 한국은? 2020년대엔 2.2%, 2030년 이후에 1%대가 IMF 전망이다. 이 수치로만 놓고 보면 ‘피크 차이나’보다는 ‘피크 코리아’가 더 눈앞에 와 있다. 중국도 걱정이지만, 진짜 걱정해야 할 건 우리 처지다.

한국이 ‘IMF 사태’로부터 빠르게 회복했고 금융 체질도 개선된 건 사실이지만, 경제 효율성은 여전히 의문의 대상이다. 지난 2월 전경련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총요소생산성은 G5 국가(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보다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이 1이라면, 우리는 0.614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차이가 큰 항목은 ‘사회적 자본’과 ‘규제 개혁’이었다. 정부나 제도에 대한 신뢰 수준이 낮고, 규제가 민간의 투자 활력을 옭아매고 있다는 이야기다. GDP보다 많은 가계 부채가 소비를 짓누르는 데도 부동산 연착륙 명분으로 문제 해결에는 소극적이다. 대통령의 ‘카르텔’ 서슬에 연구개발(R&D) 예산은 확 깎일 조짐이다. 경제 효율과 생산성을 높이고 혁신의 활력을 키울 담대한 정책 구상이 없으면 ‘피크 코리아’는 그만큼 더 가까워진다. 폴 크루그먼의 경고는 아직 우리 주위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