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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전상 마이어, 와인 덕에 로스차일드가 금융신화 일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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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호 24면

와글와글, 와인과 글

로스차일드 가문을 일으킨 마이어 암셸 로트쉴트의 초상. [사진 손관승]

로스차일드 가문을 일으킨 마이어 암셸 로트쉴트의 초상. [사진 손관승]

평생 골목길을 걸어온 사람으로서 오랜 숙제가 있었다. 유대 금융 가문 로스차일드의 신화가 시작된 프랑크푸르트의 유덴가세(Judengasse)를 찾아보는 일이다. 독일어로 유대인 골목을 뜻하며, 도시 성벽과 해자 사이 폭이 3.6m밖에 안 되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늘어서 있던 게토 지역이다. 20여 년 전 독일에 근무할 때는 무심코 지나쳤던 것을 보면,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알게 된다는 여행자의 잠언 그대로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전설을 만든 마이어 암셸 로트쉴트가 유대인 골목에서 태어난 것은 1744년이다. 5년 뒤 1749년 조금 떨어진 동네에서 괴테가 태어난다. 상업과 문화 도시 프랑크푸르트를 빛나게 한 두 거인의 탄생이다. 마이어의 조상이 언제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유대인 골목에서 작은 가게를 꾸려 생계를 이어 나가던 집에 붉은(rot) 방패(Schild) 간판이 있었기에 로트쉴트(Rothschild)라는 독일식 성을 쓰게 됐고, 후손들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면서 영어로 로스차일드라 불리게 된다. 유대인 골목은 그 신화의 출발점이다.

괴테는 회고록 『시와 진실』에서 소년 시절 유대인 골목길 체험을 묘사하고 있다. “좁고, 불결하고, 시끄럽고, 생소하고, 듣기 싫은 언어의 악센트, 그것들이 하나가 되어 도시 관문 옆을 지날 때 들여다본 것만으로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불결한 인상을 주었었다. 오래도록 나는 혼자서 그곳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호기심 강한 괴테는 어른의 안내를 받아 유대인 골목길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나는 곧잘 유대인 학교를 찾아가 할례나 혼례를 구경하고 또 추수 감사절이 어떤 것인지 알 때까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나는 어디서나 대단한 환영을 받았고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다시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아직 어린 나이여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진 못했겠지만, 역사를 움직인 두 인물이 어쩌면 골목길에서 서로 어깨를 스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고급 와인으로 꼽히는 ‘샤토 라피트 로쉴드’의 1999년산 레이블. [사진 위키피디아]

최고급 와인으로 꼽히는 ‘샤토 라피트 로쉴드’의 1999년산 레이블. [사진 위키피디아]

마인강을 따라 걷다가 유덴가세 지역에 도착했다. 제2차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과 현대화의 영향으로 옛 자취는 찾을 길 없고, 유덴가세 박물관 내 발굴 터에서 지난 세월을 상상할 뿐이다.

마인강변의 슈테델 미술관에는 이탈리아 기행을 상징하는 화가 티슈바인의 그림 ‘로마 캄파냐의 괴테’가 있다. 괴테가 귀국할 때 함께 독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탈리아에 남아 있었는데, 훗날 로스차일드 가문의 일원인 아델레 폰 로트쉴트가 소장했고 1887년 슈테델 미술관에 기증했다. 이로써 이 가문은 괴테와 또 연결된다.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와인이다. 괴테는 포도주 거래로 재산을 모았던 혈통답게 평생 와인의 친구가 된다.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가 가문을 일으킨 이면에도 와인이 자리 잡고 있다. 『The Rotschilds(로스차일드 가문)』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자 유대인인 저자 프레데릭 모턴이 로스차일드 가문을 직접 인터뷰해 쓴 책이다. “토요일 저녁 예배가 끝나면 마이어는 종종 랍비를 초대했다. 둘은 녹색 책상에 마주보고 앉아 와인을 들며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이어는 원래 랍비가 되기 위해 예시바 학교에 다니다 부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생업에 뛰어들게 되는데 이때부터 계산과 사업에 대한 놀라운 재능을 발휘한다. 처음에는 옛 동전을 팔고 환전상으로 일하다가 돈이 모이자 상품 리스트에 와인을 추가한다. “마이어는 고물을 진열하던 자리를 깨끗이 치웠다. 면포뿐 아니라 와인·담배도 들여놓았다. 이 상품들과 (근사한 옷차림의)손님들 덕분에 건물 전체의 품격이 올라간 듯했다.”

헤센-카셀 군주인 빌헬름 1세가 자산위탁을 위해 마이어를 방문한 장면을 화가 모리츠 다니엘 오펜하임이 그렸다. [사진 GettyImagesBank]

헤센-카셀 군주인 빌헬름 1세가 자산위탁을 위해 마이어를 방문한 장면을 화가 모리츠 다니엘 오펜하임이 그렸다. [사진 GettyImagesBank]

고물상 마이어가 신분 제약을 뚫고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던 데는 헤센-카셀 군주인 빌헬름 1세의 신임이 결정적이었다. 제후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 청원서 덕분이다. 비록 유대인 골목길에서 쓰이던 이디시어가 섞이긴 했지만, 진솔한 편지 덕분에 지도층과 연결될 수 있었다. 와인과 글이 ‘와글와글’ 신나는 인생을 열어준 것이다. 가문의 저택을 개조한 유대인 박물관은 로스차일드 가문과 창업자에 관해 유덴가세 박물관보다 훨씬 더 풍부한 자료를 전시 중이다. 군주 빌헬름 1세가 마이어에게 개인 자산을 위탁하는 장면을 그린 유대인 화가 모리츠 다니엘 오펜하임의 그림도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도약하게 되는 결정적 장면이다.

마이어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각각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영국·프랑스에서 사업을 했고 모두 성공한다. 금융, 광산, 철도에 이어 와인까지 사업 범위가 확대되어 유대인 음모론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와인 애호가라면 최고급 와인 ‘샤토 라피트 로쉴드’와 ‘샤토 무통 로쉴드’를 알 것이다. 로쉴드는 로스차일드 가문을 프랑스식으로 부른 것. 창업자의 막내아들이자 프랑스 제일 부자였던 자크(야콥) 드 로쉴드는 자신의 파리 집 주소(Laffitte)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라피트(Lafite) 와이너리를 사들이려 노력했고 사망 직전에 비로소 꿈을 이뤘다. 독일 출신 유대인 시인 하이네가 와인을 마시면서 망명의 고단함을 잊었던 곳도 그의 저택이었다. 반면 ‘샤토 무통 로쉴드’는 영국으로 보냈던 3남 나탄의 아들, 즉 창업자의 손자 너대니얼이 파리로 건너와 사들인 양조장이다.

장남이 담당한 프랑크푸르트 종가는 후손이 없어 끊겼지만 가문의 흔적은 남아있다. 오페라 극장 옆에 있는 로트실트 파크다. 게토 지역 밖에 처음으로 빌라를 사들여 거대한 공원을 조성한 곳으로 가문의 성공을 상징하지만, 현재는 녹색 공원에 작은 비석 하나와 안내문이 있을 뿐이다. 빛이 큰 만큼 어둠이 컸기 때문일까? 가문을 일으킨 마이어는 유대인 묘소에서 말없이 잠들어 있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 를 지냈으며,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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