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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레네서 영감 얻은 헤밍웨이, 바스크족 와인 마시며 글 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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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5호 24면

와글와글, 와인과 글

빌바오 핀쵸스바 풍경. [사진 손관승]

빌바오 핀쵸스바 풍경. [사진 손관승]

일생에 한 번은 피레네산맥을 넘어 신비한 바스크족이 사는 땅을 밟아보고 싶었다. 테라 인고그니타(Terra incognita), 라틴어로 미지의 땅 혹은 낯선 영역의 은유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선 역할을 해온 이 거대한 산맥은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통과의례 코스였다. 헤밍웨이, 파올로 코엘료, 세스 노터봄 같은 세계적 작가들의 삶은 피레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그것은 괴테에게 알프스산맥, 연암 박지원에게 만리장성의 의미에 비유할 수 있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배는 항구에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파올로 코엘료의 책 『순례자』에 나오는 한 문장이며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코엘료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길에서 영감을 받아 최초로 발표한 작품이기도 하다. 과거에 겪은 실패 때문에 또 다시 실패할까 두려워하는 것이고, 과거에 쟁취한 것을 잃을까봐 두려운 것이라고 작중 인물의 입을 빌어 작가는 말한다.

나도 마침내 스페인 북쪽 빌바오 공항에 내렸다.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구겐하임 박물관과 제프 쿤스의 작품 퍼피 덕분에 도시재생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 빌바오를 두 발로 만났다. 산세바스티안이 세계적인 미식 도시로 유명하지만 빌바오의 골목길에도 핀쵸스 바가 즐비하다. 핀쵸스란 얇은 꼬챙이로 빵 위에 얹은 해산물이나 고기, 버섯 등을 안정적으로 지탱하는 형태의 가벼운 스낵으로 스페인 다른 지역에서 타파스라 부르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바스크 지방 특유의 음식 문화이다. 핀쵸스에는 ‘챠콜리’(Txakoli)라 부르는 바스크 지방 특유의 화이트와인을 곁들이는 게 보통인데, 마치 폭포처럼 높은 곳에서 와인 잔에 포도주를 따르는 묘기가 특징이다.

산티아고 순례자의 출발장소 생장피에드포르. [사진 손관승]

산티아고 순례자의 출발장소 생장피에드포르. [사진 손관승]

시차 적응을 마친 뒤 렌터카로 피레네 산맥과 바스크 지방을 두루 살펴보기로 했다. 차를 몰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에스테야, 리오하 와인 산지와 멀지 않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한 최초의 안내서를 쓴 12세기 프랑스 사제는 이 지역이 “맛있는 빵과 훌륭한 포도주와 고기와 생선을 맛볼 수 있는 풍요로운 곳이며, 부드럽고 깨끗하며 수질이 뛰어난 물을 만날 수 있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이라체 수도원의 와이너리는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데, 산티아고 순례길 걷는 사람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수도꼭지 두 개를 일반인에게 개방해 하나의 수도꼭지에서는 물, 다른 꼭지에서는 붉은 포도주가 나와 잠시나마 육체의 갈증과 영혼의 고단함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와인 박물관 입장도 무료다.

마침 점심 때여서 차를 몰고 국도의 식당에 들어갔다. 바스크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곳으로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곳. 옆 테이블에서 먹는 음식을 참조해 주문했더니 대구와 새우, 조개를 넣고 끓인 생선탕이 빵과 함께 나오는데 맛도 일품. 인근 공사장에서 일하다 식사하러 온 한 무리의 남자들은 바스크어로 말하고 있었는데 태어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언어였다. 식사에 붉은 포도주를 곁들이고 있었다. 포도주에 물인지 토닉워터인지 타서 마시는 모습이 달랐을 뿐이다. 마치 헤밍웨이 소설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빵 한 조각과 평범한 포도주 한 잔이 주는 소박한 행복의 현장이다.

팜플로나에 마침내 도착했다. 기자였던 헤밍웨이가 작가로서 재탄생할 수 있었던 운명의 장소, 그가 이 도시를 처음 찾은 1923년 이후 꼭 100년 만에 내가 방문한 것이다. 성난 황소와 함께하는 축제인 ‘산 페르민’이 7월에 열리기 때문에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았다. 헤밍웨이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됐지만 그가 커피와 와인을 마시며 작품을 구상하던 카페 이루냐는 여전히 성업 중이고 친구들과 술 마시던 근처 골목길은 와인잔을 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친구들과 송어 낚시하던 강가를 지나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다.

피레네 협곡의 바스크족이 롤랑부대를 격퇴한 기념조각. [사진 손관승]

피레네 협곡의 바스크족이 롤랑부대를 격퇴한 기념조각. [사진 손관승]

이곳은 프랑스에서 출발한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도시이며 유럽 인문학에서 유명한 ‘롤랑의 이야기’가 탄생한 곳이다. 사실은 샤를마뉴(칼 대제)가 아끼던 기사 롤랑이 부대를 이끌고 무모한 작전을 펼치다 이 협곡에서 바스크족 전사들에게 몰살당한 수치의 기록이었지만 훗날 이슬람족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는 레콩기스타 운동 때 명예로운 기사도 문학으로 둔갑한 것이라고 이곳 연구자들은 말한다. 바스크족은 옛날부터 거친 바다에서 고래 사냥하던 해양민족이자 피레네산맥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산악 민족이기도 하다.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이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환경이다.

피레네가 얼마나 거대한 산맥인지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을 세 번 넘나들며 실감할 수 있었다. 대부분 순례자의 출발 장소인 생장피에드포르와 비아리츠를 거쳐 해안 도시 비다르(Bidard)에 도착했다. 프랑스쪽 바스크 지방의 작지만 아름다운 휴양 도시다. 골목마다 가게마다 모든 게 반짝거린다.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짐작할 수 있다. 숙소 주인의 권유로 마신 이룰레기(Irouleguy), 스페인 바스크의 영혼이 담긴 술이 챠콜리라면 프랑스 바스크 지방에서는 이룰레기 와인이다.

다시 차를 몰고 산세바스티안, 바스크 이름으로는 도노스티아. 이곳의 콘차 해변의 핀쵸스 바에 헤밍웨이 주인공처럼 혼자 앉았다. 작품 속에 샤토 마고를 주문해 마시는 장면으로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었다. 세상은 조용하고 나를 아는 이는 한 명도 없다. 주류와 궤도에서 일탈한 고독한 여행자다. 달콤쌉쌀한 익명성이 곧 자유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옆자리에 앉은 아돌포라는 이름의 바스크 남자와 대화를 나누다 한 잔 건넸더니, 그는 내 등을 살짝 치더니 두 잔을 산다. 와인은 풍성하고 글의 영감이 샘솟게 만드니 바스크는 ‘와글와글’의 진정한 고향인 듯싶다. 보이지 않은 여행 가방을 그곳에 남겨두고 왔다. 가방 찾으러 간다는 핑계로 언젠가 다시 가야겠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 를 지냈으며,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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