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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 왜 와인 많이 싣고 갔나? 장거리 항해 ‘생명 음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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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1호 24면

와글와글, 와인과 글

1893년에 제작된 콜럼버스 신대륙발견 항해모형. [사진 위키피디아]

1893년에 제작된 콜럼버스 신대륙발견 항해모형. [사진 위키피디아]

일찍부터 필생의 과제를 찾아낸 사람은 행운이다. 반면 기량이나 생각이 무르익는 중년의 시기에 남다른 창조력을 발휘하는 ‘늦게 피는 꽃’도 적지 않다. 좋아하는 일에 푹 빠져 시간과 공간 개념을 잊을 정도로 몰입 상황을 가리켜 행복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플로우(Flow)’라고 명명하였다. 행복한 몰입 상태를 말한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필생의 과업을 찾아낸 행운아에 속한다. 이 야망의 사나이는 꿈을 찾아 고향을 떠난 덕분에 여러 나라말을 익히고 지리와 천문학, 역사 서적을 섭렵하였고, 먼 나라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특히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에 푹 빠졌다. 신대륙으로 향하던 탐험선에 챙겨갔던 그 책의 여백에 라틴어로 남겨놓은 친필 메모는 인도와 중국, 일본을 향한 콜럼버스의 열정이 얼마나 큰지 짐작하게 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미친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다.”

애플의 유명한 광고처럼 그는 역사를 바꿔놓았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서도 슈테판 츠바이크는 ‘언제나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광적으로 믿었던’ 인물이라 평가했다. 유럽인의 입장에서는 신대륙을 발견한 영웅이지만, 원주민에 대한 고문과 학살 등 잔혹 행위를 일삼았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지면서 침략주의의 상징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죽을 때까지 그는 자신이 탐험한 곳을 아시아라고 믿었지만, 그토록 원하던 금광이나 향신료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의 원정은 그러나 인류의 역사뿐 아니라 생태계에서도 엄청난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학계에서 ‘콜럼버스의 대전환(Columbian Exchange)’이라 표현하는 대변환이다.

미국의 저명한 과학 저술가 찰스 만의 『1493』은 콜럼버스가 대항해에 나선 1492년 직후 구대륙과 신대륙에 미친 에코시스템의 변화를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묘사한 역작이다. “유럽인 원정대들은 소, 양, 말 같은 가축들은 물론이고 사탕수수, 밀, 바나나, 커피와 같은 작물을 아메리카 전역에 들여놓았다…지렁이, 모기, 바퀴벌레, 꿀벌, 민들레 그리고 아프리카의 풀들과 쥐들이 전혀 낯선 곳에 첫발을 내디딘 여행자처럼 눈을 둥그렇게 뜨고 선박에서 줄줄이 새로운 땅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 책에 따르면, 생전에 그를 콜럼버스로 알고 있던 사람은 없었다. 고향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크리스토포로 콜롬보로 세례를 받았고 포르투갈에서는 크리스토파오 콜롬보로 이름을 바꿨고, 스페인에서는 크리스토발 콜론으로 개명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그의 사후 영어권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콜럼버스는 와인의 역사에도 큰 전환점을 마련하는데, 기함인 산타마리아를 비롯해 니나, 핀타 등 3척을 이끌고 스페인의 팔로스 항구를 떠날 때 배 안에는 포도주로 가득한 거대한 오크통이 실려 있었다.

1492년 8월부터 1493년 3월까지의 콜럼버스의 1차 항해일지 사본이 현재까지 전해지는데 이곳에 여러 차례에 걸쳐 와인 기록이 남아있다. 신대륙 와인 역사의 첫 장이다. 기함 산타마리아가 좌초된 직후인 12월 26일 기록에는 “1년 이상 먹고 마실 수 있는 빵과 포도주, 파종할 씨앗들, 본선의 보트 등 많은 것을 남겨두었다”라고 적고 있으며, 1월 2일에는 에스파뇰라섬의 요새에 39명의 선원을 잔류시키면서 “1년치의 비스킷, 포도주와 더불어 대포도 남겨두었다”라고 기록했다.

콜럼버스 선단은 가져가야 할 것들도 많은데 왜 포도주를 많이 가져갔을까? 장거리 항해에서 금방 상하는 물보다 와인이 훨씬 안전한 음료로 간주됐고 가톨릭 종교적 의미도 있었다. 스페인으로 귀환하는 바다에서 적은 1월 25일의 기록에서는 돌고래와 큰 상어를 잡았는데, 남은 식량이 빵과 포도주 등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아 절실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유럽인들에게 ‘빵과 포도주’의 의미는 각별하다. 콜럼버스의 항해에서도 포도주는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생명의 음식이었다. 폭풍우와 파도가 몰아치던 2월 14일에는 배 안의 식수와 포도주를 대부분 소비해버려 배가 가벼워져 전복될 위험이 컸기에 빈 포도주통과 식수통에 바닷물을 채워 배를 무겁게 했더니 상황이 나아졌다는 기록도 있다. 무사 귀환 직후 콜럼버스는 세비야의 오크통 제조사에게 포도주 통이 정교하지 않아 술이 새는 일이 많이 발생했으니 시정해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아직 포도주병이 발명되기 전이고, 오크통 제조 기술도 많이 떨어지던 대항해 시기 초기의 일이다.

그러면 신대륙에 첫발을 내디딘 영광의 주인공은 어떤 와인일까?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데다, 그가 네 차례나 원정을 떠났기에 스페인의 많은 지역이 저마다 주인공이라 주장한다.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의 리베이로 와인이 그중 한곳. 당시에 가장 훌륭한 와인 생산지역이었으며 콜럼버스와도 인연이 많았으며, 이후 1502년의 선적 기록도 남아있기에 유력한 곳 가운데 하나다. 까스티야 이 레온에서 생산되는 토로(Toro) 와인은 템프라니요의 일종인 포도로 만든 레드와인인데 역시 주인공 와인을 주장한다. 현재 스페인을 대표하는 리오하 지역과 리베라 델 두에로 와인, 헤레스 지역에서 생산되는 강화 와인 셰리, 그리고 포도주와 함께 럼주와 브랜디도 함께 선적되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6개월 뒤 2차 항해에서는 10여명의 가톨릭 사제도 합류해 아메리카 지역에 포도 재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시간이 흘러 신대륙에서 처음 포도 재배와 포도주 생산에 성공한 곳은 멕시코였다. 황금과 향료를 찾아오지 못하자 콜럼버스는 세상의 냉대 속에 55세로 인생을 마감하였지만, 그의 와인은 세상을 바꾸었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 를 지냈으며,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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