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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포도주 한 잔만 마셨으면" 수도사의 와인 예찬 '백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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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3호 24면

와글와글, 와인과 글

배우 숀 코너리가 출연해 화제가 됐던 영화 ‘장미의 이름’은 독일의 에베르바흐 수도원에서 촬영했다. [사진 손관승]

배우 숀 코너리가 출연해 화제가 됐던 영화 ‘장미의 이름’은 독일의 에베르바흐 수도원에서 촬영했다. [사진 손관승]

한 잔의 와인과 한 권의 책이 때로는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기도 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과 에베르바흐 수도원, 그리고 근처 와인 카페에서 마셨던 한 잔의 와인이 내게는 그러하였다. 10년 전 직장 생활을 마감한 뒤 출구를 찾지 못해 먼 길을 떠났다가 라인 강변에 있는 작은 도시 뤼데스하임에 도착한 것이 발단이었다.

라인가우 와인의 중심지이며 레스토랑과 선물 가게가 줄지어 있는 좁은 골목 드로셀가세(Drosselgasse)의 어느 작은 와인 바에 들어가 간단한 요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카페 주인이 와인 한 잔을 무료로 건네면서 ‘깐뻬이’(乾杯)를 외쳤다. 나를 중국인으로 생각한 것이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그는 미안하다고 하더니 통성명과 함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클라우스 아우어라는 이름의 카페 주인은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솔직하고 쾌활했다. 와인 마니아 괴테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고 있다는 얘기에 반가운 표정을 짓더니 와인 한 병을 가져왔다. “괴테를 알고, 와인을 안다는 것은 곧 인생을 안다는 뜻입니다. 비싼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만남을 기념하고자 이 와인을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독일 라인 강변엔 40㎞ 넓은 포도밭

에베르바흐 수도원이 직접 생산한 다양한 포도주. [사진 손관승]

에베르바흐 수도원이 직접 생산한 다양한 포도주. [사진 손관승]

‘성 요한 수도원’에서 재배한 2011년 산 ‘괴테 와인’으로 전동 장비를 이용해 병에 내 이름까지 새겨 주는 게 아닌가. 소속감을 잃고 방황하던 이에게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선물이었다. 헤어지기 직전 그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에베르바흐(Eberbach) 수도원을 꼭 들려보라고 했다. 『장미의 이름』이 영화로 만들어졌던 수도원으로 작품 내용을 미리 읽어보고 방문하면 좋을 것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소설은 도서관의 필사본을 둘러싼 수도원 내의 갈등과 살인사건이 큰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우린 책을 위해서 살죠. 무질서와 부패로 가득한 이 세상에선 편안한 임무랍니다.” 소설 속에서 움베르토 에코가 수도사 벤노의 입을 통해 농축된 지식을 탐식하는 자의 기쁨을 말하고 있는 장면이다. 수도원장이 미소를 지으며 도서관은 ‘정신적 미로임과 동시에 지상의 미로’라는 말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지적 탐구 세계의 비유였다.

에베르바흐 수도원이 직접 생산한 다양한 포도주와 음식을 함께 맛볼 수 있는 야외식당. [사진 손관승]

에베르바흐 수도원이 직접 생산한 다양한 포도주와 음식을 함께 맛볼 수 있는 야외식당. [사진 손관승]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수도원 내 식사와 포도주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사들이 포도주, 치즈, 올리브 열매, 빵, 그리고 고급 건포도를 날라다 주었다.” 백미는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필사하는 중세의 수도사가 필사본 여백에 남겼다는 “아, 포도주 한 잔만 마셨으면”이라는 대목이었다. 힘든 노동 끝에 한 잔의 포도주가 주는 위로의 힘을 이보다 더 멋있게 예찬할 수 있을까?

중세 시대 수도원의 포도원 경작과 포도주에 관한 지식 없이는 쓸 수 없는 작품이었다. 작게는 와인과 글을 결합한 ‘와글와글’ 시리즈의 아이디어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크게는 유럽 인문학의 깊은 맛에 빠져 스스로 ‘글로생활자’의 길을 감행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 작품이 바로 소설 『장미의 이름』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또 다른 10년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 여름 나는 유럽으로 향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스페인 바스크 지방으로 떠나기에 앞서 에베르바흐 수도원을 다시 방문하기로 했다. 소설 원작에서 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이탈리아 북부 베네딕트 수도원이지만 영화가 촬영되었던 곳은 독일의 수도원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동차를 타고 서쪽으로 약 한 시간 정도 달리면 고성들이 보이는 한편으로 라인강 우측의 경사진 곳을 따라 포도밭 풍경을 발견하게 된다.

와인, 시간의 무게 이겨야 진가 발휘

이탈리아어판 소설책 『장미의 이름』. [사진 손관승]

이탈리아어판 소설책 『장미의 이름』. [사진 손관승]

“독일의 강물이며 피를 다시금 뿜어주는, 독일의 살아 숨 쉬는 혈관이다.” 『그림동화』를 쓴 그림형제의 표현처럼 라인강은 독일 낭만주의가 태동한 곳이다. 강변으로 약 40㎞가량 펼쳐진 거대한 포도 지역을 가리켜 ‘라인가우 리슬링 와인 루트’라 부른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신 경영 20주년 기념 만찬에 라인가우의 백포도주를 내놓았을 정도로 고급 와인 생산 지역이다. 깎아지른 남향의 경사지에 포도밭이 위치한 이유는 햇볕을 최대한 많이 받기 위해서라고 한다.

10년 만에 에베르바흐 수도원에 다시 도착했다. 1135년 창건된 수도원답게 금방이라도 프란시스코회 수사 윌리엄(배우 숀 코너리)이 제자 아조와 함께 튀어나올 것 같은 중세풍의 분위기다. 수도원 옆 슈타인베르크 포도밭과 옛 포도주 양조장 장비들, 1126년의 와인 경작 및 거래 문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거래 장부 등이 남아있다.

소설에 상세하게 묘사된 것처럼 포도원 경작으로 자립경제를 유지해야 했던 중세의 수도원 시스템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잦은 전쟁과 전염병으로 포도밭이 황폐하게 되어도 성찬식에 필요한 와인을 자급자족 조달해야 했기에 결과적으로 중세의 와인 산업에 수도원이 기여한 공은 매우 컸다. 포도밭 입구 고랑 맨 앞줄에 붉은 장미꽃이 지키고 있는 게 보였다. 포도밭에 왜 장미인가? 장미는 포도나무와 비슷한 습성을 가지고 있어, 포도나무가 영양부족이나 병충해로 이상이 생기기 전에 장미가 먼저 유사한 증세를 보이기에 병충해를 알려주는 전령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라틴어 문장을 떠올리게 만드는 바로 그 장미였다. “장미의 이름으로 태초의 장미가 존재하나 우리는 빈껍데기 이름만 취한다.”

중세 시대 ‘보편 논쟁’의 한축을 이루던 유명론(唯名論)과의 연관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작가의 진짜 의도는 아무도 모른다. 작품의 묘미이기도 하다.

수도원의 명물인 야외식당에 자리 잡고 빵과 한 잔의 와인을 주문했다. 와인은 발효와 숙성의 산물이다. 포도즙이 포도주가 되기 위해서는 발효되고 숙성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의 무게를 이겨내야 진가를 발휘한다는 뜻이다. 인문학, 친구와 더불어 와인을 좋아하는 이유다. 하지만 질문은 남는다. “How old is too old?”(얼마나 숙성되어야 충분히 숙성된 것일까?) 와인의 질문은 곧 인생의 질문이기도 하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 를 지냈으며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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