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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구친 불보다 시위대가 더 무서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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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시위대가 던진 벽돌에 다리를 다친 김학원씨가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부상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대전=김성태 프리랜서

"향나무 위로 활활 타는 불길보다 시위대의 눈빛이 더 무서웠습니다."

22일 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 현장에서 부상한 충남도청 방호구조과 김학원(42.소방교)씨는 "일선 소방서에 근무할 때 수많은 화재 현장에 출동했지만 시위대 때문에 다치기는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김씨는 이날 밤 도청 울타리에 심어진 향나무에 붙은 불을 끄던 중 시위대가 던진 벽돌에 정강이를 맞아 일곱 바늘을 꿰매는 전치 2주의 상처를 입어 목발에 의지한 채 출근하고 있다.

FTA 저지를 위한 대규모 궐기대회가 도청 앞에서 열린다는 소식에 김씨는 22일 오전부터 바짝 진장했다. 6000여 명이 모이면 폭력시위로 번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럴 경우 시위대 코앞에 있는 도청이 수난을 당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충남도청 소방안전본부는 대전뿐만 아니라 금산.공주 등의 소방서에서 소방차 5대와 응급 구조차 3대, 소방 인력(19명)을 지원받았다.

또 방호구조과 전 직원 17명도 모두 시위 현장에 나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오후 5시30분쯤 6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날이 어두워져도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시간 뒤 시위대는 도청 정문에서 전경들과 몸싸움을 시작했다. 정문으로 진입이 어려워지자 시위대는 오른쪽 담장으로 몰려가 횃불로 70년생 향나무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순식간에 20m 높이로 솟구쳤다.

이때 김씨 등 방호구조과 직원과 소방대원들은 소방호스와 갈퀴.쇠스랑 등을 들고 진화작업에 나섰다. 사투를 벌인 지 30여 분 만에 불길이 간신히 잡혔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문 왼쪽에 있던 향나무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김씨 등은 급히 이동해 향나무에 물을 뿌릴 준비를 했다.

그때 이미 시위대 100여 명은 도청 앞마당에 들어온 상태였다. 이들은 김씨에게 "불타고 있는 향나무에 물을 뿌리면 소방차를 태워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그는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각목과 쇠파이프 등을 들고 있는 시위대로부터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며 치를 떨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소방차를 도청 건물 뒤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타오르는 불길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도청 본관으로 뛰어들어가 소화전에서 호스를 꺼내 나왔다. 하지만 시위대는 곧바로 소방호스를 빼앗아 몸싸움을 벌이던 전경들에게 물을 뿜어댔다.

다시 도청 본관으로 들어가 또 다른 소화전을 열어 소방호스를 잡고 향나무를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다시 호스를 빼앗기면 도청 울타리 나무가 모두 타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지더군요."

향나무로 다가가 호스를 들이대려는데 갑자기 시위대로부터 벽돌 한 장이 날아와 그의 다리를 강타한 뒤 발등을 찍었다.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공수특전단 출신인 김씨도 과격 시위대의 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김씨는 직원들의 부축을 받고 응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후송됐다. 정문호 방호구조과장은 "불도 아닌 사람이 던진 돌에 부하직원이 다치다니 할 말이 없다"며 "벽돌을 던진 사람을 찾아내 배상을 요구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충남 천안 출신인 그는 1996년부터 소방직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대전=김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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