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추락하던 금발의 9등신…장애인 등장 뒤 영화 찍은 '바비' 반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영화 '바비'(사진)가 개봉하며 모델이 된 바비 인형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바비'(사진)가 개봉하며 모델이 된 바비 인형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배우 마고 로비가 주연한 영화 '바비'(감독 그레타 거윅)가 글로벌 흥행에 청신호를 켰다.
북미에서 21일(현지시간) 개봉한 '바비'는 경쟁작 '오펜하이머'(감독 크리스토퍼 놀란)를 넘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개봉 첫 주말까지 1억 5500만 달러(한화 약 1987억 원)를 돌파하며, 올해 북미 최고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했다. 영화는 또 '캡틴 마블'(1억 5340만 달러)을 넘어서며, 여성감독 영화 사상 개봉 주말 최대 스코어라는 새로운 기록을 썼다. 영화는 국내에서도 19일 개봉 이래 25만 관객을 모으며 순항 중이다.
로이터는 최근 55세 미국 중학교 교사의 2만 달러 상당 바비 콜렉션을 소개하며 “비밀스러운 취미가 ‘바비’ 영화 개봉에 힘입어 인기를 얻게 됐다”고 보도했다. 1970년대 용돈으로 첫 바비 인형을 구매한 소년 시절 “부모가 남성적이지 않다고 여길까 봐 (바비 취향을) 숨겼다”는 이 교사가 바비 콜렉션을 자랑한 인스타그램 계정 팔로어수가 7만명이 넘는다면서다.

1959년 탄생해 전세계적으로 10억개 이상 판매된 바비는 한때 9등신 금발 서구 미인의 대명사이자 패션‧문화 아이콘이었지만, 외모 지상주의를 조장한다는 비판 속에 2010년대 들어 위상이 추락해왔다. 제조사인 미국 완구회사 마텔은 여전히 연매출 50억 달러(약 6조 4450억 원) 중 3분의 1을 차지하는 바비의 재기를 위해 다인종‧임산부‧장애인 등 다양한 외양과 고정된 성역할을 넘어서는 직업군 인형으로 다양화 전략을 꾀했다.
최근엔 다운증후군 특성을 반영한 바비까지 출시했다. 이런 변신에 힘입어 내리막길을 걷던 매출이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회복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마텔의 IP(지적재산) 전략 첫 사례인 영화 ‘바비’는 올해 64세가 된 인형의 생명력이 여전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출사표나 다름없다. 페미니즘이라는 선명한 주제를 담고서다.

"분홍 페인트 동났다" 바비랜드 실상은

19일 개봉하는 영화 '바비'는 전세계 10억개 이상 판매된 미국 마텔사의 동명의 인형이 주인공이다.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바비랜드’에서 살아가던 ‘바비’(마고 로비)가 현실 세계와 이어진 포털의 균열을 발견하게 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켄’(라이언 고슬링)과 예기치 못한 여정을 떠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19일 개봉하는 영화 '바비'는 전세계 10억개 이상 판매된 미국 마텔사의 동명의 인형이 주인공이다.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바비랜드’에서 살아가던 ‘바비’(마고 로비)가 현실 세계와 이어진 포털의 균열을 발견하게 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켄’(라이언 고슬링)과 예기치 못한 여정을 떠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바비'는 DC 히어로 시리즈의 악녀 ‘할리퀸’ 배우이자, 여성 영화‧드라마(‘아이, 토냐’, ‘조용한 희망’ 등) 제작에 참여해온 배우 마고 로비가 주연‧제작을 겸했다. 각본‧연출은 아카데미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작은 아씨들’(2020)의 그레타 거윅 감독이 맡았다. 개봉 전인 지난 달 미국 인테리어 잡지 ‘아키텍처 다이제스트’는 영화에서 바비와 남자친구 켄 등이 사는 극 중 인형들의 세상 ‘바비랜드’를 완벽히 구현하느라 특정 페인트사의 형광 분홍 페인트가 동났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1959년 '바비 인형'을 탄생시킨 미국 마텔스의 공식 온라인 쇼핑몰에는 이제 '바비'로 검색되는 제품이 600여개다. 전형적인 외모였던 과거와 달리 다양한 인종과 체형, 직업을 가진 다채로운 바비 인형이 판매 중이다. 홈페이지 하단엔 '놀이를 통해 다음 세대를 응원한다(empowering next generation through play)란 슬로건이 선명하게 적혀있다. 사진 마텔 홈페이지 캡처

1959년 '바비 인형'을 탄생시킨 미국 마텔스의 공식 온라인 쇼핑몰에는 이제 '바비'로 검색되는 제품이 600여개다. 전형적인 외모였던 과거와 달리 다양한 인종과 체형, 직업을 가진 다채로운 바비 인형이 판매 중이다. 홈페이지 하단엔 '놀이를 통해 다음 세대를 응원한다(empowering next generation through play)란 슬로건이 선명하게 적혀있다. 사진 마텔 홈페이지 캡처

영화 공개 후엔 형식적인 페미니즘으로 위장한 가부장적 세계에 대한 비판적인 주제가 주목 받고 있다. 한 미국 비평가는 “영화를 보며 ‘가부장제’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데킬라 한 잔씩 마셨다면 영화가 끝날 때쯤 죽었을 것”이라는 농 섞인 평을 했을 정도다. 영화에선 성 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이 개선된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인 양성평등을 위해선 갈 길이 멀다는 주제가 강조된다.

'인형놀이=예비육아' 공식 깬 바비

'바비'에서 1959년 초대 바비의 탄생을 표현한 장면. 아기 모양 인형으로 예비 육아하듯 인형 놀이를 했던 소녀들이 처음 성숙한 여성 모습의 인형을 통해 인식을 바꾸는 순간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패러디해 그렸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바비'에서 1959년 초대 바비의 탄생을 표현한 장면. 아기 모양 인형으로 예비 육아하듯 인형 놀이를 했던 소녀들이 처음 성숙한 여성 모습의 인형을 통해 인식을 바꾸는 순간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패러디해 그렸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마고 로비는 “어렸을 때 바비와 안 친했다. 진흙탕에서 놀고 주머니에 도마뱀을 넣어 다녔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64년 전 수영복 차림의 ‘전형적인 바비’의 모습으로 나타나, 소녀들을 ‘해방’시키는 오프닝 장면부터 상징적이다. 아기 인형으로 예비 육아나 다름없는 인형 놀이를 해야 했던 소녀들은 아기 인형들을 던져버리고 단숨에 바비에게 매료된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SF 걸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서 원시 인류에 문명을 깨우쳐준 검은 돌기둥을 패러디해, 바비 인형이 소녀들의 인식을 옥죄던 현모양처 여성관을 깨부수는 순간을 그렸다.
영화는 바비 없이는 의미 없는 존재로 여겨졌던 켄이 인간 세상에 왔다가 가부장제에 눈뜨는 과정도 그린다. 마초적 역할을 자주 해온 배우 라이언 고슬링이 좋아하는 바비의 마음을 얻지 못하자, 아예 바비랜드를 차지하려 드는 켄 캐릭터를 과장된 연기로 주제에 맞게 잘 살려냈다.

바비 파는 마텔사, 女중역 부재 비판 장면도

현실 세계에서 바비 인형을 통해 페미니즘을 상품화한 마텔사의 중역진엔 정작 여성이 없다고 꼬집는 장면도 있다. 꿈같은 세계에서 늘 미소 짓던 바비는 마텔사에서 일하는 라틴계 워킹맘(아메리카 페레라)을 만나 현실에 눈뜨고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다.

19일 개봉한 영화 '바비'에서 바비랜드에서 무시당하던 남성 인형 '켄'들은 인간 세상에서 배운 가부장제를 통해 인형 세상을 차지하려 한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19일 개봉한 영화 '바비'에서 바비랜드에서 무시당하던 남성 인형 '켄'들은 인간 세상에서 배운 가부장제를 통해 인형 세상을 차지하려 한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지난 3일 내한 행사에서 거윅 감독은 “바비는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브랜드여서 용기가 필요했다. 시대에 앞서기도, 뒤처지기도 한 바비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했다”면서 “모든 여성이 바비고 모든 바비가 여성이다. 바비의 정체성이 모든 사람을 대변한다는 데서 아이디어가 시작됐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영화에는 루스라는 노인이 등장하는데, 바비는 원래 미국 여성 사업가 루스 핸들러가 딸 바버라(바비의 정식 명칭은 바버라 밀리센트 로버츠다)가 종이인형을 갖고 어른 역할 놀이를 하는 걸 보고 착안했다. 아기 모양 인형이 대다수이던 당시 성인 여성 모습의 독일 인형 ‘바일드 릴리(Bild Lilli)’를 본따 만들었다. ‘10대 패션 모델인형’이라고 홍보한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의 초대 바비는 부모들이 반발할 거란 예상과 달리 첫해에만 35만개가 팔리며 대박이 났다.

 앤디 워홀 바비 그림 11억원…루브르 바비 전시도

제작 겸 주연을 맡은 마고 로비는 영화 '바비'의 미국, 호주, 한국, 멕시코 월드투어 행사에서 오리지널 바비 인형이 입고 있던 다채로운 바비 코어 의상을 선보여 화제를 불러모았다. 미국 LA에서 치러진 프리미어 행사에서 1960년의 ‘Solo in the Spotlight’ 바비를 오마주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작 겸 주연을 맡은 마고 로비는 영화 '바비'의 미국, 호주, 한국, 멕시코 월드투어 행사에서 오리지널 바비 인형이 입고 있던 다채로운 바비 코어 의상을 선보여 화제를 불러모았다. 미국 LA에서 치러진 프리미어 행사에서 1960년의 ‘Solo in the Spotlight’ 바비를 오마주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1960년의 ‘Solo in the Spotlight’ 바비.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1960년의 ‘Solo in the Spotlight’ 바비.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한때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바비는 여전히 패션‧문화 아이콘으로 군림하고 있다.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이 자신의 뮤즈이자 바비 애호가였던 23세 보석 디자이너를 바비 인형 스타일로 그린 초상화는 2014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72만 파운드(약 11억 9509만원)에 팔렸다. 1974년 뉴욕 타임스퀘어의 한 구역은 일주일간 ‘바비 대로’로 불렸고,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선 2016년 바비 인형 전시회를 열었다.
영화 개봉을 계기로 바비 인형 시장은 다시 활기를 띠는 분위기다. 바비 테마의 호텔 방부터 칫솔‧의류 등이 쏟아지고 있고 바비를 앞세운 마케팅도 한창이다. 시대 변화에 따라 바비의 소비 타깃 또한 남녀노소로 확장됐다. 수집 가격도 계속 오르고 있다. 로이터는 초창기 생산된 바비의 가격이 상승하는 추세라며, 영화 속 로비가 연기한 1959년산 바비는 수천 달러에 판매되고 있다고 전했다. 60여년 전, 소녀들의 동화 속 세계에서 탄생한 바비는 이처럼 현실 세계와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1959년 마텔사가 출시한 초대 바비 인형 모습이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1959년 마텔사가 출시한 초대 바비 인형 모습이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