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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 47명, 사라진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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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정진호 기자 중앙일보 기자
정진호 경제부 기자

정진호 경제부 기자

지난 10일 시작한 집중호우로 인한 사망자는 23일까지 47명이다. 실종자 3명은 아직 찾지 못했다. 인명피해 현황을 숫자로 설명하는 건 한 문장이면 충분하지만, 숫자 뒤엔 한 문장은커녕 책 한 권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47명이 사망했다는 건 47개의 세계가 사라졌다는 의미다. 그 중엔 경북 예천에서 수해 실종자를 수색하던 중 사망한 해병대 고(故) 채수근 상병도 있다. 채 상병은 대학을 다니다 1학년을 마친 뒤 지난 3월 해병대에 자진 입대했다. 그의 부모 결혼 10년 차에 시험관 수술로 태어난 외아들이었다.

지난 22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해병대 고(故) 채수근 상병의 안장식. [뉴스1]

지난 22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해병대 고(故) 채수근 상병의 안장식. [뉴스1]

오송 지하차도를 지나다 인근 제방이 무너지면서 사망한 14명에게도 각자의 사연이 있다. 안모(24)씨는 취업 후 친구들과 여수 여행을 가기 위해 오송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가 빠져나오지 못했다. 결혼 2개월 차 초등학교 교사인 김모(30)씨는 임용시험을 보는 처남을 시험장에 데려다주려고 지하차도를 지나던 길이었고, 박모(76)·백모(72)씨는 토요일임에도 함께 출근하는 길이었다.

기자로서 가장 힘든 일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늘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할 때”라고 답한다. 정확히는 남겨진 사람을 만나야만 하는 순간이다. 숱한 목숨이 사그라진 재난의 현장엔 유족이 있고, 기자가 있다. 돌아가신 이의 가족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순간이면 늘 도망치고 싶었다.

2020년 4월에도 그랬다. 경기 이천물류센터 공사 현장에서 유증기가 폭발하면서 발생한 화재로 38명이 사망했다. 당시 합동분향소 앞에서 만난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철저히 이유를 밝혀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이 사건이 이대로 묻히면 안 된다”라고 했다.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관심은 사그라들었다.

22일 해병대는 채 상병의 부모가 자필로 쓴 편지를 공개했다. 그의 부모는 “이번 사고를 계기로 수근이가 사랑했던 해병대에서 철저한 원인 규명을 통해 다시는 이같이 비통한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근본 대책을 조속히 마련해 주시길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채 상병의 가족이 아들의 이름과 얼굴을 언론에 공개하는 것에 동의한 것 역시 아들의 아픔이 더 오래 기억돼 비극이 묻히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사망·실종자가 1만8500명에 달한 동일본 대지진을 소재로 한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을 만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우리가 어떤 문을 열어왔는지 돌아보고 확인하고 닫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화 막바지, 스즈메가 어릴 적 쓴 일기장엔 3월 11일(동일본 대지진 발생일)이 새까맣게 칠해져 있다. 그렇게 영화는 재난이라는 트라우마를 비껴가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다. 기억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