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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새마을금고와 가브리엘라 수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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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조현숙 기자 중앙일보 기자
조현숙 경제부 기자

조현숙 경제부 기자

1926년 메리 가브리엘라 뮬헤린 수녀가 조선에 첫발을 디뎠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출신의 스물여섯 살 젊은 수녀가 도착한 평안도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시골 곳곳을 다니며 일제에 시달리던 가난한 농민을 도왔다. 10년 넘게 이어진 봉사는 일본의 추방 명령으로 중단해야 했다. 극한으로 치달은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였다.

그는 발음이 어려운 가브리엘라 대신 ‘가별 수녀’라고 자신을 부르던 조선의 아이들을 잊지 못했다. 1952년 6·25전쟁으로 황폐해진 한국 땅을 다시 찾았다.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전쟁미망인 등 피난민을 돕는 일을 했다.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것으론 부족했다. 전후 한국엔 돈이 모자랐고, 금융 시스템이랄 것도 없었다. 고리대금에 시달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수녀가 되기 전 전 허드슨 탄광회사에서 일했던 가브리엘라 수녀는 회계 전문가로서의 특기를 발휘했다. 1930년대 캐나다를 경제 대공황에서 건져낸 신용협동조합 ‘안티고니시 운동’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가브리엘라 수녀는 1960년 5월 국내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인 ‘성가신용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정부가 주도하는 재건국민운동본부와 손잡고 전국을 다니며 협동조합 지도자 강습회도 열었다. 강습회에 참여한 청년들이 마을로 돌아가 금고 설립에 나섰다. 1963년 5월과 6월 사이 경남 하둔·월곡·정암·외시·마산 5곳에 마을금고가 세워졌다. ‘근검·절약해 저축하고 상부상조하면서 잘살아 보자’. 소박하지만 절실한 구호는 통했다. 불과 1년 후인 1964년 5월 말까지 경남에서만 169개 마을금고가 생겨났다. 새마을금고의 시작이었다.

60년이 지나 새마을금고는 총자산 284조원(지난해 말 기준)에 이르는 금융사로 자라났다. 대형 시중은행에 버금가는 규모다. 그러나 일부 지역 금고의 부실 대출과 연체율 급등으로 새마을금고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금융당국의 ‘급한 불 끄기’로 도미노식 예금 인출 사태는 막았지만 불안이 다 가신 건 아니다.

“성장이란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다. 넓어지는 가지를 뿌리가 감당할 수 없으면 나무는 쓰러진다.” 수십 년 전 가브리엘라 수녀는 협동조합의 미래를 이렇게 고민했다고 한다. 지금 새마을금고에 필요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