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축구장 수십개 날린다…동맹도 "美 우크라 '집속탄' 지원 반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미국이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집속탄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하자, 서방 동맹국들이 민간인 피해를 우려하며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나섰다.

집속탄은 한 개의 모(母)폭탄이 터지면서 그 속에 들어있는 소형 자(子) 폭탄이 쏟아져 나와 여러 개의 목표물을 동시다발로 공격하는 무차별 살상무기다. 축구장 수십 개에 해당하는 수 헥타르의 넓은 면적을 한꺼번에 초토화시켜 ‘강철비’라 불린다. 자폭탄 중 불발탄 비율은 10~40%로, 전쟁 후 몇년 뒤까지 휴면 상태로 남아 있다가 돌연 폭발해 어린이 등 민간인에 피해를 입힐 수 있어 세계 100여 개국이 사용을 금지했다.

지난해 4월 루한스크 지역 리시찬스크의 한 도로에 집속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300mm 로켓의 미폭발 꼬리 부분이 박혀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해 4월 루한스크 지역 리시찬스크의 한 도로에 집속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300mm 로켓의 미폭발 꼬리 부분이 박혀 있다. AFP=연합뉴스

英·스페인 등 서방 동맹국 "집속탄 지원 반대"

8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과 영국 BBC 방송 등에 따르면, 이날 영국·캐나다·스페인 등 미국의 동맹국 일부는 전날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집속탄 지원을 결정한 것에 대해 일제히 반대 의견을 표시했다. 이들 국가는 그간 우크라이나에 군사·경제적 지원을 해왔지만 ‘극도로 치명적인 무기’인 집속탄 지원만큼은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영국은 ‘집속탄에 관한 협약(CCM)’에 서명한 123개국 중 하나로, 이 협약을 계속 지키기로 결심했다”고 밝히며, 미국의 집속탄 제공에 부정적인 입장을 명확히 했다. CCM은 2010년 집속탄의 사용과 제조·보유·이전을 금지하는 내용으로 체결된 유엔 협약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 중 3분의 2 가량이 이에 비준한 상태다. 미국과 러시아·우크라이나를 포함해 71개국은 CCM에 가입하지 않았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마르가리타 로블레스 스페인 국방장관 역시 “스페인은 (집속탄과 같은) 특정 무기와 폭탄을 우크라이나에 보낼 수 없다는 확고한 약속(CCM)을 갖고 있다”면서 “우크라이나의 정당한 방어는 찬성하지만, 집속탄으로 (방어가) 수행돼선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캐나다 정부는 성명을 통해 “캐나다는 CCM 협약을 완전히 준수하고 있으며, 집속탄 사용에 반대한다”면서 “수년 동안 터지지 않은 채 놓여 있는 폭탄이 특히 어린이들에게 미칠 잠재적 영향에 대해 우려한다”고 밝혔다. 크리스 힙킨스 뉴질랜드 총리도 “(집속탄은) 무차별적이며 잠재적으로 무고한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피해 양상이 오래 지속된다”며 미국의 집속탄 지원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독일은 집속탄 지원 자체에는 반대하지만, 미국의 고민에 대해 이해한다는 입장이다. 안나레나 베어복 독일 외무장관은 “독일은 CCM 협약에 서명한 나라”라면서 집속탄 지원에 반대했지만, 슈테판 헤베스트라이트 독일 정부 대변인은 “우리의 우방인 미국이 그러한 탄약(집속탄) 공급에 관한 결정을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면서 미국의 입장을 일부 옹호했다.

미국 내부에서도 비판이 확산했다. 프라밀라 자야팔 의원 등 민주당 하원 진보 모임 소속 19명은 이번 결정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안전한 집속탄 같은 건 없다”면서 “전 세계 인권을 옹호하는 미국의 리더십을 약화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다만 전 나토 부사령관이었던 리차드 시레프 장군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방어선을 더 쉽게 돌파하기 위해선 집속탄이 배치돼야 한다며 미국의 결정을 옹호했다. 그는 “서방이 더 빨리, 더 많은 무기를 제공했다면 지금 이 무기를 제공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BBC에 전했다.

한 우크라이나 군인이 러시아군이 사용한 로켓 중 해체된 집속탄을 들고 있습니다. 로이터=연합뉴스

한 우크라이나 군인이 러시아군이 사용한 로켓 중 해체된 집속탄을 들고 있습니다. 로이터=연합뉴스

바이든 "어려운 결정, 한시적 지원"

앞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전날 우크라이나에 집속탄을 포함, 고속기동로켓시스템(HIMARS) 탄약 등 모두 8억 달러(약 1조400억원) 규모의 신규 군사 지원을 단행한다고 발표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집속탄 제공과 관련해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다”면서 “동맹을 비롯해 의회와 상의해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방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영구적이 아니라, 우리가 충분한 (155㎜ 곡사포용) 포탄을 생산할 때까지 과도기 동안 우크라이나에 집속탄을 한시적으로 지원하기로 한 것”이라고 부연했다.

같은 날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성명을 통해 “새로운 지원 패키지에 포함된 무기와 장비는 전장에서 우크라이나군의 용맹성을 강화하고, 그들이 우크라이나 주권 영토를 되찾으며, 시민을 보호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불발탄에 대한 우려에 감안해 “미국이 제공할 집속탄은 불량 비율이 2.5%를 넘지 않을 것”이라며 “러시아는 불발률이 30~40%인 집속탄을 사용해왔다”고 설명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 초반 러시아의 집속탄 사용을 강력하게 규탄한 바 있다. 국제법상 집속탄으로 적군을 공격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지만, 민간인을 공격하면 전쟁 범죄에 해당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는 즉각 미국의 결정을 환영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시의적절하고 광범위하며 절실히 필요한 군사 원조를 결정해준 미국 대통령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올렉시 레즈니코우 우크라이나 국방장관은 “미국이 제공한 집속탄을 러시아 본토에 사용하지 않겠다”면서 “집속탄은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생명을 구하고, 우리의 영토를 탈환하며 적의 방어선을 뚫는 데만 사용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러시아는 “미국의 결정은 절망적인 행위이자,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실패에 대한 무기력함의 증거”라고 비난했다. 마리아 자카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집속탄을 책임감 있게 사용하겠다’는 우크라이나의 약속에 대해 “아무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