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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학부모 “수능 5개월도 안 남았는데 돌발 문항 만나” [수능시험 손질 논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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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5호 05면

SPECIAL REPORT 

“킬러문항 잡으려다 돌발 문항.” “갑자기, 혼란 그 자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정부의 새로운 대입수학능력시험(수능) 가이드라인이 나오자 이런 말들이 튀어나왔다. 격노와 걱정이 쏟아졌고, 체념과 허탈도 묻어났다. 지난 19일부터였다. 이날 오후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서 만난 고3 최유정(가명·18)양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는 “수능이 다섯 달도 안 남은 상황에서 갑자기 (수능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것은 학생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지 화가 난다”고 했다. 그는 “킬러문항 잡으려다 나온 돌발 문항”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20일 늦은 밤. 마포구의 24시간 스터디 카페에 있던 재수생 서수진(20)씨는 “최근 대통령의 발언에 크게 흔들리고 있다. 시험(수능)을 보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을 수 있겠나”고 말했다. 21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의 학원가에서 자녀를 기다리고 있던 학부모 곽모(52)씨는 “수능 난이도가 상당히 낮아져서 변별력이 없어질 것 같다”며 “ 우리 애가 수시도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혼란 그 자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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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5개월 앞, 윤석열 대통령과 교육부가 킬러문항 배제 방침을 밝혔다. 모의평가에서 킬러문항을 줄이지 않은 교육부 수능 담당 국장이 경질됐다.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감사를 받게 되자 원장은 사임했다. 대통령실과 교육부는 수능을 쉽게 출제하라는 것이 아니라 ‘공교육과정 내 출제 원칙’을 강조한 것이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그 해명이 킬러문항처럼 더 어렵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정부는 메스를 꺼냈지만 수술 부위도, 수술 과정도 깔끔하지 않다는 평이다. 지난 19일부터 22일까지 나흘 간 중앙SUNDAY가 만난 학교와 학원 관계자, 수험생과 학부모는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혼자 공부했는데 학원 다닐까 고민”

재수생 서씨는 스터디카페 휴게실에서 잠을 쫓고 있었다. 그는 “원래 재수학원에 갈 생각이 없었는데 정부가 흔들어대니, 지금부터라도 학원에 다녀야 할지 고민 중”이라며 “고3 학생들이야 학교에서 정보를 주고 친구끼리 공유도 하고, 학원에서 입시 설명회도 열지만 나처럼 혼자 공부하는 재수생은 더욱 불안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마침 그가 보던 TV에서 수능 관련 소식이 나왔다. 서씨는 “정부가 불확실성을 더 키운 것 같다”고 한마디 더 했다. 염리동의 최양은 “내년 수능을 치르는 2007년생들은 수험생 수도 많다던데, 나를 포함해 우리(현재 고3) 중에 재수생까지 대거 생기면 내년도 걱정된다”며 “이래저래 걱정이 밀물처럼 몰려온다”고 말했다.

22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거리는 학원 수업을 마치고 쏟아져 나온 ‘학생 천국’이었지만, 고3 김민재(19)군은 “지옥을 경험하는 것 같다”고 했다. “수학, 영어보다는 국어 영역에서 좀 달라질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모든 게 불확실해서 전전긍긍하고 있다”며 “변별력이 없어진다고 해서 좋아하는 친구들은 별로 없고, 다들 당장 7월, 그리고 9월 모의고사가 어떻게 나올까 신경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김씨의 말대로 당장 7월, 9월 모의고사가 문제다. 교육부 수능 담당 국장이 경질된 상황에서 정부의 방침에 호응하는 ‘보여주기식’ 문항들로 채워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고3 학부모 이정미(46·서울 양천구)씨는 “이렇게 되면 또 다른 정보전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며 “입시 변화에 대응하려면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시간 많은 부모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이씨는 “장기적으로 사교육비를 절감하겠다는 것은 공감되지만 정책이 너무 갑작스럽게 바뀌는 것은 오히려 사교육 부담을 증가시키지 않을까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씨의 말대로 사교육비 부담은 점점 커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사교육 시장 규모는 26조원. 전년 23조4000억원에서 10.8% 이상 증가했다. 물가 상승률 5.2%의 2배가 넘었다. 지난 2007년 조사 이후 역대 최대 규모다. 소득이 많은 가정일수록 초중고 자녀에게 지출하는 사교육비도 많았다. 월평균 소득 800만원 이상 가구가 300만원 미만 가구보다 3배 이상 많았다.

학부모 중에는 공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정부의 전반적인 방향에는 동의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고3 예체능 수험생 자녀를 둔 정미영(49)씨는 “안 그래도 학원비로 한 달에 300만원 넘게 나가고 입시 상담, 배치 상담, 설명회 참석 등등 너무 신경 쓸 게 많다”며 “정부의 방침이 이런 부분을 조금이라도 덜어준다면 환영”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학부모 김모(51)씨는 “갑작스럽지만, (정부가) 정확한 가이드라인을 잡아주고 입시와 관련해서 단일화된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학교서 안 배운 문제 내는 건 비정상”

학원 강사들 사이에서는 애꿎은 사교육을 비난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서울 종로구의 한 학원에서 강사로 있는 김지석(39)씨는 “킬러문항 카르텔이니 뭐니 사교육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 같다”며 “결국 공교육이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것을 사교육에서 채우자는 것인데 왜 우리를 힐난하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치동 학원 강사 권보현(39)씨는 “사교육을 없앤다고 수능 문제를 운운하기 이전에, 모든 학생이 똑같은 교육을 받도록 공교육이 제대로 잡히는 게 우선”이라며 “공교육이 불만족스러우면 고액 과외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학입시 관련 커뮤니티도 혼란스럽다. 대학입시 커뮤니티 ‘수만휘’에는 킬러문항 축소와 출제 경향에 대한 게시물이 올라오자 댓글이 이어졌다. “결국 상대평가라 사교육 안 받는 애들이 이득을 그렇게 볼 거 같지도 않고, 오히려 열심히 공부한 최상위권들 물 먹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실수 싸움으로 등급이 나뉘면 그 또한 억울한 일”이라는 의견이 올라왔지만,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문제가 나오면 안 되는 게 정상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댓글도 달렸다.

수험생도 아니고, 학부모도 아닌 ‘일반인’들의 우려도 있었다. 지난 21일 서울 시청 근처의 회사에 다니는 김현길(41·서울 강북구)씨는 “만점자가 66명이나 나올 정도로 최악의 물수능으로 꼽히는 2001학년도 시험을 치렀는데, 실수 하나로 인 서울이냐 아니냐로 갈렸고, 이번에도 그럴까 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동료 박모(41)씨는 “나도 사교육을 받고, 수능을 치르고, 회사에서 열정 페이를 받고, 연애는 하지만 집값·양육비 무서워 월세 살고 아직 결혼을 안 하고 있다”며 “각자의 삶이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예정된 같은 길로 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흘간 거리와 공간에서 만난 이들은 30명. 애초 취재 대상은 아니었지만, ‘일반인’ 박씨의 말은 또 다른 혼돈이었다. 수능-사교육-부동산-결혼 기피와 저출산. 그리고 다시 수능…. ‘예정된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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