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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물난리 잊었나…1만곳 수해 무방비 [물난리 그곳 그후 1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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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참, 하늘을 원망할 노릇도 아니고. 올해는 잃을 것도 없지만.”

지난 12일 서울 서초구 진흥종합상가에서 만난 이영식(79)씨는 비 내리는 하늘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지난해 기록적 폭우가 이곳을 덮치며 상가 지하는 빗물로 가득 찼고, 40곳에 달했던 상점들은 여전히 공실로 남아 있다. 상가 지하로 내려가자 사라지지 않은 퀴퀴한 흙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계단 바로 옆이 쌀가게와 정육점을 겸하던 이씨의 가게였다. 이씨는 지난해 8월 8일 판매 중이던 쌀포대로 가게 입구를 막는 등 ‘빗물과의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지하로 쏟아진 흙탕물에 냉장고와 육절기를 버리는 등 1억원가량의 피해가 발생했다. 장사를 재개하지 못한 채 1년 가까운 시간을 소득 없이 지낸 이씨는 올여름 장마철이 또 다른 악몽이 되지 않을까 벌써 걱정이다.

기록적인 ‘폭포비’와 태풍 힌남노가 전국 곳곳을 휩쓸면서 큰 피해를 남긴 지 1년이 돼 갔지만 침수 피해를 본 전국 곳곳은 여전히 복구가 진행형이다. 25일 제주에서 부터 장마가 시작된다.

중앙일보 취재팀은 장마철을 앞두고 지난해 비 피해가 심각했던 서울 강남·관악과 경북 포항 지역을 둘러보고 수해 대책을 점검했다. 그 결과 현장 복구는 더디기만 했다. 또 정부와 지자체가 쏟아낸 대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와 지자체는 지난달 1일부터 사흘간 대비 상황을 확인하기 위한 합동점검도 했다. 지적 사항 142건이 나왔다. 지자체가 사후관리·상황전파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거나(22건) 구체적인 대피 기준·장소조차 정하지 않는 사례(50건) 등이 쏟아졌다.

정부는 지난달 19일 여름철 자연재난(풍수해·폭염)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뒤늦게나마 피해가 컸던 반지하 주택 등을 새로 포함해 지정한 ‘인명피해 우려 지역’ 5400여 곳을 집중적으로 관리하기로 했다. 국유지나 공공시설 등에 인명피해 우려 지역이란 안내문을 부착하고 점검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반지하 주택 등은 민원 발생을 우려해 표시하지 않는다. 집주인이 집값 하락을 걱정해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SH, 올해 반지하주택 98가구 매수…목표치 3% 그쳐

김현서 디자이너

김현서 디자이너

반지하로 빗물이 유입되는 걸 막을 차수판(물막이판)이나 탈출 때 방해물이 되는 고정형 방범창을 개폐형으로 바꾸는 침수방지시설 설치도 지지부진하다. 21일 국민의힘 정우택 의원이 행안부로부터 파악한 지역별 침수방지시설 설치 대상 중 서울은 2만341곳 가운데 7945곳(39.1%)만 설치됐다. 경기도는 설치율 12%로 더딘 편이다. 인천은 설치율 44%를 보였다. 전국으로 보면 물막이판 등이 필요한 취약지는 3만704곳이다. 이 중 이미 설치가 완료됐거나 예정 중인 2만873곳을 제외한 9827곳(32%)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다.

서울시는 침수가 우려되는 반지하 주택을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를 통해 사들이고 있다. 하지만 매입한 주택은 98가구에 불과했다. 올해 목표치(3450가구)의 2.8% 수준이다. 상습 침수지역인 강남역·도림천·광화문 일대에 들어설 대심도 빗물 배수터널은 4년 뒤에나 완공된다.

각 지자체는 지속적인 침수방지시설 설치와 빗물받이 청소, 예찰 강화 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인력·예산 부족 등 문제로 실제 상황 발생 시 과연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지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는 상황이다. 또 2019~2021년간 풍수해 때 인도 위 ‘흉기’가 되는 옥외광고물 추락·전도 사고는 한 해 평균 70건 발생했다. 하지만 새로운 내풍(耐風) 설계 기준이 담긴 옥외광고물 설치 표준 가이드라인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열심히 대비하고 있지만, (주민 민원이나 인력 문제 등)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김진유 경기대 도시교통학과 교수는 “물막이판 등 안전시설을 의무적으로 설치할 수 있게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며 “현재 시스템만으론 앞으로 닥칠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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