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한때 ‘코리아 드림’을 꿈꾸던 응우옌 판 지(21)는 지난해 마음이 꺾였다. 한국의 고용허가제(Employment Permit System·EPS) 프로그램을 8개월간 준비한 지인의 탈락 소식을 접하고 나서다.
연간 5만~6만에 고정된 이주 쿼터...경쟁국 보다 작고, 불법체류 고용 부추겨 #형식적 시험에 기업, 이주자 미스매칭도 빈번 #베트남 교수, "쿼터 적은 건 일본, 대만보다 노동 시장 규모 작아서?"오해 하기도
판 지는 “한국어 능력 시험을 통과했지만, 면접에서 탈락한 지인을 보고 한국 행을 포기했다”며 “나처럼 형편이 어려운 시골 출신은 한 번의 탈락으로 생기는 비용도 감당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재팬 드림’을 꿈꾸며 공부하고 있다.
2004년 도입된 고용허가제(EPS)는 한국의 저숙련 외국인력 도입 주요 창구다. 올해 4월 기준 27만8363명의 이주노동자가 고용허가제를 통해 발급받은 E-9 비자로 체류하고 있다.
고용노동부와 산하기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외국 인력 선발·도입·체류관리 등을 모두 책임진다. 이 때문에 EPS는 종전의 외국인력 도입 제도였던 산업연수생제 아래 발생한 민간 브로커의 송출 비리 등을 근절해 투명성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외국 인력을 짧게 쓴 뒤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단기 순환’ 원칙이 더는 한국 현실에 맞지 않게 되자 20년간 큰 변화 없이 이어진 주력 취업이민제도의 기능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EPS는 공공 주도로 운영하다 보니 산업 현장의 민감한 요구에 빠르게 대응하기 어렵다. 경직된 쿼터 운용이 대표적이다. 최근 10년 동안 EPS 쿼터는 매년 5~6만 명 수준에서 변함이 없었다. 그간 인력난을 호소하는 산업 현장의 아우성은 정부에 닿지 않았다. 올해 11만 명으로 쿼터를 대폭 확대했으나 이는 최근 2년간 코로나 19 대유행으로 줄어든 인원을 보충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송출국에서도 불만이 있다. 한·베 수교 첫해인 1992년부터 한국으로 베트남 노동자를 송출하는 업무를 맡아온 응우옌 짜 리엠 베트남 노동보훈사회부 해외노동국 부국장은 “고용허가제에서 16개 송출국에 정원을 제한하는 건 시장을 왜곡하는 것”이라며 “한국 기업의 수요만큼 인력을 도입하지 않으니 불법 체류자라도 쓰게 되는 부작용도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수요·공급을 반영 못 한 정책에 베트남에선 웃지 못할 오해도 발생했다. 당 응우옌 아인 베트남 사회과학원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달 16일 취재진을 만나 한국의 쿼터가 변하지 않는 것을 두고 “한국이 일본, 대만보다 노동 시장 규모가 작아서 그런 것이냐”고 물었다.
수요에 미치지 못한 공급 인력마저도 제대로 배치되고 있지 않다. 고용허가제 선발 과정이 성적에 따른 ‘줄 세우기’ 수준이라서다.
고용부 산하 한국산업인력공단은 16개 송출국 현지에 설치한 고용허가제(EPS) 센터를 통해 한국어 능력 시험과 기능 수준 평가를 한다. 이후 면접을 거친 뒤 높은 점수순으로 합격자를 결정하고, 이중 3배수를 고용주에게 알선해 계약을 체결한다.
EPS 센터장을 지낸 A씨는 “농업은 외바퀴 손수레를 S자 코스로 몰 수 있는지, 제조업은 시간 내에 색깔과 크기가 다른 핀을 꽂을 수 있는지 등을 본다”며 “말이 기능평가지 순발력 테스트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미스매칭으로 노동자가 무한정 대기하는 경우도 있다. A씨는 “성적대로 뽑아 놨는데 고용주가 특정 국가, 성별, 학력을 따지면 그에 맞지 않는 합격자는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며 “시험 성적은 높지만, 제조업 현장 등에서 사업주가 선호하지 않는 여성의 경우 애꿎은 피해를 본다”고 지적했다.
고용주와 노동자가 서로의 정보를 충분히 알기 어렵다는 점도 미스매칭 심화 요인이다. 정부가 고용주에게 면접 녹화 본을 공유하고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사업장 정보와 사진 등을 제공한다지만, 현장에서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고용주는 업종에 적합하지 않은 인력이 배치돼 불만이고 외국인 노동자도 예상과 다른 작업 환경에 당황하기 일쑤다. 이는 사업장 변경 요청 또는 사업장 무단이탈에 따른 불법체류로 이어진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이 지난달 고용허가제 인력을 활용하는 종업원 5인 이상 중소기업 500개사를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 58%는 입국 후 6개월 이내 근로자가 계약 해지를 요구하는 상황을 겪었다.
한국의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외국 인력의 경우 기본적인 의사소통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서석용 한국이민사회전문가협회 하노이 지부장은 “당장 인력이 급하니까 형식적으로 교육하고 대충 ‘안녕하세요’만 알아들으면 보내달라는 식인데 그래놓고 막상 인력이 오면 회사도, 노동자도 서로 불만족이다”라며 “정부가 산업별 필요 인력을 중장기로 정확히 측정해 교육 기간을 확보하거나 민간 경쟁을 통해 교육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반면 경쟁국의 민간 인력송출업체는 발 빠른 혁신에 나서고 있다. 베트남 등 동남아 7개국에 지부를 두고 있는 일본 인력송출업체 ‘오노데라 유저 런’(OUR)은 지난 2019년부터 일본어·기술 교육, 기숙사 비용을 무료로 제공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외국인력을 모집하고 있다.
일본의 개호(돌봄)업, 음식료품 제조업 등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경험을 쌓은 선생님이 6개월 동안 맞춤형 교육을 한다. 송출국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력도 일본 내에 배치해 이주노동자의 적응을 돕는다.
시바 히토미(柴瞳) OUR 홍보부 차장은 “큰 빚을 지고 일본에 들어와 불법체류 등 문제를 일으키는 외국인이 많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한 시스템”이라며 “학생에게 돈을 받지 않는 대신 고용주에게 업계 평균보다 높은 소개료를 받지만 확실한 인재를 소개해 만족도가 높다”고 말했다.
베트남 하노이의 송출업체도 미스매칭을 줄이기 위해 체계화된 교육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주로 일본으로 인력을 보내는 송출업체 비나(VINA) JSC는 교육생이 일본으로 가기 전 일반적으로 4~6개월간 하루 7시간 이상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가르친다. 기숙사에서 단체 생활도 해야 한다. 이 업체 사장을 비롯한 11명의 교사는 전부 일본에서 3년 이상 일한 ‘경력 선배’로 업무뿐 아니라 생활 전반의 ‘꿀팁’을 전수한다.
교육생은 이곳에서 ▶일본 거주지에서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법 ▶지하철 및 대중교통 타는 법 ▶ATM 사용법은 기본이고, ▶일본의 4계절 평균 기온 ▶인감도장을 자주 쓰는 일본 사회 분위기 등까지 미리 배운다.
강사가 건넨 ‘일본 생활 안내’ 교재 ‘쓰레기 버리는 법’에서는 쓰레기는 반드시 쓰레기봉투를 사서 그 안에 넣어야 하고, 음식물 쓰레기는 수분을 제거해 신문지 등으로 감싸야 한다는 등 설명이 정리돼 있었다.
‘주택 이용’ 편에는 “일본의 사무실과 달리 주택에는 일반적으로 현관이 있고, 외부에서 신었던 신발을 벗어야 하니 주의해야 한다”는 내용이 일본어와 베트남어로 적혀 있었다. ‘인감 사회’ 편에서는 일본은 관공서에서나 계약할 때, 물건을 받을 때 등 인감을 써야 하며 인감이 없다면 계약 효력이 없을 수 있다는 부분을 설명했다.
팜 반 싸우 VINA JSC 사장은 “업무 관련 교육만 받고 해외에 가면 문화 차이로 인한 차별을 겪기 쉽다”며 “교육을 철저히 받을수록 적응이 빨라 근무지 이탈이나 불법 체류 등 부작용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기준 고용허가제 전체 인원(26만8413) 중 20.5%(5만5171명)가 불법체류하고 있지만, 고용허가제와 유사한 일본 ‘기능실습제’의 불법체류자는 전체 인원(32만4940명) 중 2.5%(7985명)에 불과하다.
한국도 현지에서 맞춤형 교육을 강화해 미스매칭을 줄여야 한다는 제안이 나오는 이유다. 주요 송출국에서 EPS 센터장을 지낸 B씨는 “하노이 폴리텍대학 같은 곳과 협업해 국가직무능력표준(NCS)에 따라 금형·용접·도장공을 저렴한 교육비로 양성해야 한다”며 “이를 통해 잘 정착한 숙련인력을 정주형 이민자로 받아들이는 비자 경로를 설계하면 국가, 기업, 이주민 모두가 이득”이라고 말했다.
고용주가 ‘외국인 고용부담금’을 내고 이주노동자 관리 책임을 나눠져야 한다는 제안도 있다. 대만이 대표적 사례다. 대만 취업복무법에 따르면 고용주들은 이주노동자 임금 10% 수준의 ‘취업안정비’(고용부담금)를 국가에 납부해야 한다.
이는 기금으로 조성돼 직업훈련 등 내국인 지원과 불법체류 단속 경비를 지원하는 등 이주노동자 유입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데 사용된다. 대만 고용주는 송출업체가 파견한 체류관리 직원을 위해서도 일정 금액을 지불한다.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을 역임한 박영범 한성대 명예교수(경제학)는 “공공부문이 미스매칭을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는 쉽지 않다”며 “입국 후 이주노동자의 체류 관리를 돕는 민간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를 위해선 고용주도 미스매칭 문제를 정부가 다 해결하라고 떠넘길 게 아니라, 대만 고용주들처럼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이주노동자 유입에 따른 비용을 나눠야 한다”고 했다.
비판이 누적되자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말 “20년 전 제도 설계 당시의 기본 틀을 큰 변화 없이 유지하다 보니 제도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효과성은 떨어질까 봐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밝히며 ‘고용허가제 개편방안’을 발표했다.
▶준숙련 인력이 10년 이상 체류할 수 있는 장기근속 특례 제도 ▶한국어 능력이 우수한 외국인 유학생의 고용허가제(E-9) 비자 전환 허용 ▶내·외국인을 포괄한 전체 노동시장을 조망하는 중장기적 노동시장 통계 분석 인프라 구축 등이 골자다. 다만 노사 간 첨예한 쟁점인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 허용 방안은 담기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도균 전 제주 출입국·외국인청장은 “고용허가제의 핵심인 ‘단기 순환’ 원칙을 스스로 부정한 개편안”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고용허가제가 그간 체류 기간을 4년 10개월로 제한한 이유는 국적법상 외국인의 체류 기간이 5년을 넘기면 귀화를 신청할 수 때문”이라며 “누더기 꿰매듯 고용허가제 개편하기보다는 정주화를 전제한 이민정책을 대안으로 내놓는 게 실정법과도 부합한다”고 꼬집었다.
김 전 청장은 "사업장 변경 문제는 손도 못 대고 있다. 결국은 일본처럼 업종 내 이동 정도는 허용해줘야 시장 안에서 미스매칭이 해소될 여지가 생긴다"고 지적했다.
박영범 명예교수는 “고용부가 그간 복지부동하다가 외부에서 위협이 오니까 제도 개편을 서두르고 있다. 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법무부 주도로 이민청이 설립되더라도 고용부가 20년 동안 외국인 고용 정책을 운용하면서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무시하면 안 된다”며 “서로 유기적 협력을 할 수 있는 이민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영희 이민정책연구원 연구실장은 “취업이민정책이 특정 부처만의 영역이 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며 “고용부·법무부·해수부 등 분절적으로 나뉜 취업이민제도를 통합적 외국인력 관리체계라는 한 그릇 안에 담는 정책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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