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교육비 주범 지목…수능 킬러문항 뺀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정부와 여당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에서 이른바 ‘킬러 문항’이라 불리는 초고난도 문제를 출제하지 않기로 했다. 킬러 문항이 치솟는 사교육비의 근본 원인이라는 이유에서다. 국민의힘과 교육부는 19일 학교 교육경쟁력 제고 및 사교육 경감 관련 당정협의회를 열었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지난 정부가 방치한 사교육 문제에 학생, 학부모, 교사가 모두 힘든 와중에 학원만 배를 불리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 대통령이 여러 차례 문제를 지적했음에도 신속히 대책을 내놓지 못한 것에 대해 교육부 수장으로서 국민께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날 당정 회의에선 외국어고와 자율형사립고, 국제고를 존치하는 내용의 고교 교육력 제고 방안도 논의됐다.

관련기사

여권 관계자에 따르면 특히 킬러 문항 출제와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은 “약자인 학생들에게 장난치는 짓”이라며 “어처구니없는 비문학 국어 문제와 과목 융합형 문제는 고교 졸업예정자를 대상으로 한 수능 평가에는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은 또 “사교육 부담이 고도 성장기에는 교육 문제에 그쳤지만 저성장기에는 저출산과 고령화와 맞물려 치명적인 사회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며 “공정한 수능에 만전을 기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킬러 문항, 학원만 배불려”…수능 5개월 앞 혼란 우려도

윤 대통령은 지난 3월부터 초고난도 문항 배제를 지시했지만, 지난 1일 치른 6월 모의평가에서 지시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수능과 모의평가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이규민 원장은 이날 “6월 모의평가와 관련해 기관장으로서 책임을 지겠다”며 사임 의사를 밝혔다. 이 원장은 사의 표명 직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사퇴 압박은 없었다”면서도 “적어도 우리가 사교육 업체에서 뭘 받아서 문제를 일부러 어렵게 낸 일은 없다”고 말했다. 또 킬러 문항이 없어진 후 부작용, 출제위원들이 압박받을 것이란 우려에 대해서 이 원장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논란이 된 킬러 문항은 수능 각 과목에서 가장 어려운 문항으로, 최상위권 변별력의 핵심으로 여겨진다. 통상 국어는 철학, 경제, 과학 등 전문 지식을 포함한 비문학 문항이 킬러로 꼽히고, 수학은 주관식과 객관식 마지막 한두 문항이 킬러 문항으로 출제된다. 예를 들어, 2023학년도 수능 국어에서는 독서 부문의 ‘클라이버의 기초대사량 연구’를 다룬 과학 문항(17번)이 킬러 문항으로 꼽힌다. 상용로그, 기울기, 편차 등의 용어가 나와 문과 학생들이 특히 어려웠다는 평이 많았다. 이 문항의 정답률은 EBS 추정 15.1%에 그쳤다. 2022학년도 수능 국어에서 나온 ‘헤겔의 변증법’ 관련 문항도 난해한 소재의 킬러 문항으로 꼽히는데, 추정 정답률이 31.1%였다.

교육계에서는 킬러 문항이 고교 수준을 넘는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다.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지난해 수능 수학 46개 문항 가운데 8개(17.4%)가 고교 교육과정의 수준과 범위를 벗어났다고 지적했다. 최수일 사교육걱정 수학교육혁신센터장은 “단순히 어렵다고 해서 킬러인 것은 아니다”며 “수능의 킬러 문항은 미적분, 통계 등 너무 많은 개념을 혼합해 출제하곤 하는데, 이런 경우는 교육과정을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교육과정의 선후가 분명한 수학, 과학에 비해 국어는 킬러 문항이 교육과정을 벗어났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2020학년도 수능 국어에서 논란이 된 경제 지문은 ‘자기자본’ ‘위험가중자산’ ‘바젤협약’ 등의 생소한 용어가 등장하는 킬러 문항으로 꼽히지만, 교육과정을 준수했는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킬러 문항 배제에 대한 교육계의 반응도 다양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교육과정을 위반한 수능 문항 금지는 평가의 상식”이라며 “이제라도 ‘배운 만큼 평가한다’는 원칙이 지켜질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반면에 수능 출제진과 수험생의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만기 유웨이 부사장은 “문제를 너무 꼬거나 조건을 너무 많이 넣지 않기만 해도 난이도를 낮출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변별력도 갖춰야 한다는 메시지가 나왔기 때문에 출제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송기창 숙명여대 교수는 “수능 난이도 조절이 일시적인 사교육비 절감 해법이 될 수 있다”면서도 “어차피 서열화가 해결되지 않는 한 장기적으로는 필요한 학원을 찾고 학교생활기록부 등 다른 전형 기준을 충족하는 데 사교육비를 쓸 것”이라고 말했다.

자사고·특목고 존치 문제도 관심사다. 앞서 문재인 정부는 2019년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해 2025학년도부터 자사고와 외고를 폐지하고 일반고로 전환하기로 한 바 있다. 하지만 부산 해운대고, 경기도 안산 동산고와 서울의 8개 자사고가 취소 무효소송을 냈고, 1심에서 자사고 10곳이 모두 승소했다. 2심에서도 첫 소송이었던 부산시 해운대고가 승소를 거두자 서울, 경기도교육청은 항소심을 중단했다. 윤 대통령은 외고, 자사고 존치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다. 학부모의 선택권을 존중하고 소송 등으로 인한 현장의 혼란을 줄이자는 취지다. 교육부 관계자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보장해 주는 게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당정은 또 수능 입시 대형 학원의 거짓·과장 광고로 학부모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일부 학원의 불법행위에도 엄중 대응하기로 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