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역사적 ‘사실들’ 사이에 빈틈은 있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44호 21면

역사 문해력 수업

역사 문해력 수업

역사 문해력 수업
최호근 지음
푸른역사

바야흐로 역사가 판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 위안부,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과 역사교과서 왜곡 등 과거사를 둘러싼 한·일 간의 역사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제주 4·3 사건 등 여러 한국현대사 이슈도 국내 정치권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 사이에서도 진영 간에 논쟁이 여전히 치열하다. ‘역사전쟁’처럼 단골 정쟁거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21세기 한국에서 ‘도대체 역사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다.

역사가 이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점에 출간된 『역사 문해력 수업』은 역사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참고서다. 역사에는 무궁무진한 소재들이 있다. 최호근 고려대 사학과 교수는 역사가들이 어떤 자세와 어떤 도구로 이 소재들을 채굴하고 가공해 역사로 탈바꿈시키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전공이 아닌 일반 수업 시간에는 배우기 어려웠던 역사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방법론 등을 풍부한 사례로 설명하고 풀어내 무엇보다 읽기가 재미있다. 딱딱한 논문이나 학술서가 아니라서 누구라도 쉽게 벗 삼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3월 30일 부산 동구 일본영사관 앞에서 부산겨레하나라는 민간단체가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 역사 왜곡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 역사전쟁은 역사의 주관성 때문에 벌어진다. [연합뉴스]

3월 30일 부산 동구 일본영사관 앞에서 부산겨레하나라는 민간단체가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 역사 왜곡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 역사전쟁은 역사의 주관성 때문에 벌어진다. [연합뉴스]

특히 한국사회에서 왜 역사를 두고 이렇게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아마도 역사의 주관성 때문일 것이다. 화학이나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에서와 같은 절대적 법칙을 역사에서는 찾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역사의 특징을 잘 알게 되면 지금 일상화하고 있는 역사 다툼의 속성을 이해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명제는 맞는 걸까. 히틀러는 뮌헨 폭동 실패 후 1924년 최후진술에서 “역사는 우리에게 무죄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는 1953년 정부군의 몬카다 병영 습격 후 체포됐다가 법정에서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카스트로의 말은 그 이후 지나치게 남용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역사는 결코 자신이 주체가 돼 심판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각기 제 나름대로 주장하고 판단할 뿐이다. 경우에 따라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말이다.

전문가의 역사서술은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를 수도 있지만 퓨전 역사드라마나 역사 왜곡 문제를 일으키는 국적 불명의 드라마가 돼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역사서술이 삶에 봉사하기는 해야 하지만 불리한 사실을 외면하거나 없는 사료를 조작하는 행위까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는 인생의 스승”(키케로)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같은 사건, 인물, 행동이라도 거기서 얻어 내는 교훈이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역사가 ‘절대적’ 스승이 되기는 어렵다. 우리가 역사에 관해 배울 수는 있지만 그것을 통해 유일무이한 역사의 교훈을 얻어 내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다.

역사는 확인된 사실을 기초로 기록되지만 모든 역사서술이 ‘진실’이 되지는 못한다. 사실관계의 조합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고, 확인된 사실들 사이에서도 빈틈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서술도 그러한 경우다. 개전 시점, 개전 책임 등 기본적 사실 규명이 미진한 경우도 많다. 역사적 사실은 개별 사실들의 무질서한 더미가 아니다. 역사적 사실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거기엔 역사가들의 해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역사서술의 특징들을 볼 때 역사처럼 아전인수 격으로 ‘제멋대로’ 해석하고 고집부릴 수 있는 분야를 찾기가 쉽지 않다. 아예 처음부터 악용하고 남용하는 사례도 많다. 그럴수록 분열의 골은 더 깊어질 것이다. 『역사 문해력 수업』 같은 책을 읽고 양심적으로, 균형 감각 있게 역사를 보고 판단하는 눈을 키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