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시(詩)와 사색] 오이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44호 30면

오이지
신미나

헤어진 애인이 꿈에 나왔다

물기 좀 짜줘요
오이지를 베로 싸서 줬더니
꼭 눈덩이를 뭉치듯
고들고들하게 물기를 짜서 돌려주었다

꿈속에서도
그런 게 미안했다
『싱고,라고 불렀다』 (창비 2014)

작게 살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이것저것 담아둔 가방을 내려두고 단출하게 나서고 싶은 길이 있습니다. 기를 쓰며 잡아두었던 시간의 무게를 털어내고 필요한 기억만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품는 바람도 있습니다. 별다른 찬 없이 찬물에 밥을 말아 먹고 싶은 저녁도 있습니다. 넓게 번지는 해넘이의 노을보다 낮게 내려앉은 어둠 앞에서 더 크게 떠지는 눈이 있습니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고 싶은 밤도 있습니다. 내 진심을 증명할 말이나 행동보다 침묵에 기대는 눈빛이 한결 진실할 수 있습니다.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그냥 미안하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박준 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