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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와 사색] 마음의 수수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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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5호 30면

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 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千佛山(천불산)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마음의 수수밭』 (창비 1994)

시는 자주 어렵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낱말과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도 읽고 나면 벙벙해집니다. 지식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세상 중요한 것들은 모두 어렵습니다. 먼저 사람이 그렇습니다. 함께 지내고 사랑하는 이들이라고 해서 서로를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하지 못할 모습만 점점 커져갑니다. 또 마음이 그렇습니다. 분명 내가 가진 것인데도 연유를 찾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한 시절 품었던 것이 언제부터 스러졌는지, 어째서 가져보지 못한 것이 새로 치밀어오르는지. 이렇게 모르는 것들 앞에서 우리는 굳은 얼굴로 돌아설 수도 있고 모름의 힘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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