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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판례로 노란봉투법…김명수 대법 ‘알박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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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대법원장의 퇴임을 3개월 앞두고 대법원이 개별 조합원에게 불법 파업의 책임을 묻는 것을 제한하는 취지의 판결을 15일 쏟아냈다. 금속노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사내하청노조)의 2010·2013년 울산공장 점거에 대해 원심이 인정한 손해배상 소송 두 건을 각각 파기환송하면서다. “개별 조합원의 책임은 파업 가담 정도와 손해 기여도를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 노조와 동일한 책임을 전제로 50%를 부담시킨 건 현저히 부당하다”는 게 이유다.

더불어민주당이 입법 강행을 예고한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과 같은 취지의 판결이 나오자 법조계에서도 “대못박기 판결”이란 비판이 나왔다. 김 대법원장이 당초 이들 노란봉투법 닮은꼴 사건들을 지난해 1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가 다시 소부로 돌려보내자마자 선고를 서둘러 본인(9월)은 물론 조재연 대법관(7월), 안철상 대법관(내년 1월) 등 대법관 교체를 앞두고 알박기 판결을 했다는 것이다. 〈중앙일보 6월 12일자 4면〉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이날 현대차가 2010년 11~12월 생산라인을 점거해 278시간 조업을 중단시킨 조합원 4명을 상대로 낸 손배소에서 20억원의 배상금을 인정한 2심을 깨고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또 같은 하청노조 조합원 5명에게 2013년 7월 63분간 공정을 중단시킨 데 대해 2300여만원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원심도 역시 깨고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노동조합의 의사 결정이나 실행 행위에 관여한 정도는 조합원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며 “개별 조합원에 대한 책임 제한의 정도는 노동조합에서의 지위와 역할, 쟁의행위 참여 경위 및 정도, 손해 발생에 대한 기여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위법한 쟁의행위를 결정, 주도한 주체인 노동조합과 개별 조합원의 손해배상 책임의 범위를 동일하게 보는 것은 헌법상 근로자에게 보장된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는 민주당이 지난달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한 노란봉투법 개정안과 동일한 취지다. 개정안은 “법원은 쟁의행위와 노조 활동으로 인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경우 각 손해의 배상 의무자별로 귀책사유와 기여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책임 범위를 정하여야 한다”고 개별 조합원의 책임을 묻는 것을 제한하는 3조②항을 신설했다. 이날 대법원은 여기에 더해 “조합원의 임금 수준 등 배상 능력까지 고려하라”고 주문했다.

기업이 노조원 개인 불법 입증해야…재계 “대법이 혼란 야기”

2010년 11월 현대차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울산 3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벌이는 장면. 15일 대법원은 당시 조합원 4명에게 20억원의 손해배상을 인정한 2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연합뉴스]

2010년 11월 현대차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울산 3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벌이는 장면. 15일 대법원은 당시 조합원 4명에게 20억원의 손해배상을 인정한 2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연합뉴스]

법조계에 따르면 이번 판결은 대법원이 전합에서 노란봉투법과 같이 개별 책임을 제한하는 쪽으로 결론을 낸 뒤 소부인 3부로 넘겨 선고만 한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국회 입법 과정에서 논란이 큰 노란봉투법 사건에 대해 전합에서 미리 판례를 변경해 입법에 영향을 주려 한다는 ‘전합 정치’란 비판 여론에 부담이 덜한 소부 선고로 외양만 바꿨다는 것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민법상 공동 불법행위자 책임 원칙에 따라 노조와 개별 노조 간부 등 파업 주동자에게 동등한 책임을 물어 온 기존 판례를 사실상 변경한 것인데도 전합이 아닌 소부 선고로 했다는 점에서 법률적 논란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소부 판결 역시 전합과 마찬가지로 대법원 판례로서 하급심의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노란봉투법 입법이 불발되더라도 유사한 효력을 낼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대법원 3부는 이날 2009년 쌍용차 파업과 2013년 현대차 사건과 관련, 파업 기간 발생한 고정비(인건비·차임·제세공과금·감가상각비 등)를 “파업 종료 후 생산 감소분의 전부 또는 일부를 만회했다면 매출에 손해를 봤다고 추정할 수 없다”며 손해액 산정에서 제외한 것도 판례를 바꾼 것이란 지적이 나왔다. 기존 대법원은 정상 조업을 했더라도 불황, 제품 결함 등으로 판매 가능성이 없었다 등의 특별한 반증이 없는 한 고정비를 매출원가에 포함해 회수할 수 있었다고 추정해 손해를 인정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금속노조는 쌍용차 노조의 불법 파업을 지원했다가 원심에서 33억19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받았는데, 대법원이 이 중 “파업 복귀자들에게 지급한 18억8200만원의 인건비는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는 손해라고 보기 어렵다”고 제외함에 따라 지연이자를 포함해 100억원으로 불어났던 배상액을 대폭 감액받게 됐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현대차 사내하청노조의 2013년 63분 점거의 경우 “자동차같이 예약판매 방식으로 판매되거나 제조업체가 시장지배적 사업자의 지위에 있는 경우 생산이 다소 지연돼도 매출 감소로 직결되지 않을 개연성이 있다”며 “추가 생산을 통해 부족 생산량이 만회됐을 여지가 있다”며 노조 측 손을 들어줬다.

이번 판결을 두고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공동 불법행위의 경우 균등책임의 원칙이 적용되고 보통 단순 가담자가 아닌 불법 파업의 기획·주동자가 소송 대상이었다”며 “이 경우 책임의 개별화가 사실상 불가능해 그간 연대책임을 지라고 해왔는데 앞으로 구체적 기준 제시 없이 개별적인 판단만 하라고 하면 입증이 불가능해 개별 조합원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하지 못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판사 출신 변호사도 “개별 책임을 입증하라는 건 법 규정 자체를 틀어버리는 것”이라며 “앞으로 법원의 심리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했다.

이번 판결에 대한 반응은 재계와 노조, 여야에 따라 극명하게 엇갈렸다. 노란봉투법을 지지하는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는 “대법원이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노조법 2·3조 개정안(일명 노란봉투법)의 법적 근거를 명확히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환영했다. 한국노총 역시 “쟁의행위에 대한 사측의 묻지마식 손해배상 청구에 경종을 울리는 중요한 판결”이라고 반겼다.

반면에 경영계에선 개별 조합원의 불법행위 가담 정도를 일일이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반발했다. 황용연 한국경영자총협회 노동정책본부장은 “조합원 개개인의 귀책 사유나 손해에 대한 기여도를 사용자가 개별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정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앞으로 기업 측에선 개개인에 대한 입증을 시도하게 될 텐데, 채증 등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무력 충돌이 생길 수 있고 산업 현장의 혼란이 확대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판결이 생산라인 점거 등 불법 파업을 정당화하면서 국가경제적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질 것이란 우려도 나왔다. 강석구 대한상공회의소 조사본부장이 “분쟁을 예방해야 할 대법원이 오히려 산업 현장의 혼란을 야기하고 노사갈등을 조장하고 있다”고 반발한 이유다. 당사자인 현대차 관계자도 “대법원 판결에 대해 아쉽게 생각한다. 산업계에 미칠 파장도 우려된다”고 밝혔다.

여권에선 “사법부가 사망한 날” 등의 거친 표현까지 쓰면서 강하게 반발했다. 강민국 수석대변인은 “김명수 대법원은 미래 세대에 죄인으로 기록될 것”이라며 “아무리 해당 사건의 주심이 ‘소쿠리 투표’ 등으로 유명한 무능과 편향의 노정희 대법관이라지만 이렇게나 편향적인 면죄부 판결을 내려서야 되겠느냐”고 했다. 장동혁 원내대변인도 “오늘은 대한민국 사법부가 사망한 날, 씻을 수 없는 치욕의 날로 기억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반면에 강선우 민주당 대변인은 “사법부 판단을 존중하고 환영한다”며 “윤석열 정부와 여당은 ‘합법 노조활동 보장법’ 처리에 적극 협조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번 판결이 노란봉투법의 입법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고용노동부는 “이번 판결은 개별 조합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쟁의행위 주체이자 단체인 노동조합보다는 낮게 책정해야 한다는 법리로, 조합원들의 귀책 사유 등을 고려해 배상액을 경감하자는 취지”라며 “기업이 개별 조합원의 파업 가담 정도, 귀책 사유를 하나하나 파악해 개별 조합원별로 손해배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노조법 2·3조 개정안과는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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