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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시대’ 만든 63년 대선에는 지역감정 없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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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육성 회고록 〈5〉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

1963년 8월 30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 대장은 강원도 철원군 제5군단 비행장에서 열린 전역식에서 이 유명한 말을 남긴 뒤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다.

당시 김대중(DJ)은 야당 민주당 대변인이었다. 두 해 전 5·16 군사정변이 터지는 바람에 4전 5기 끝에 강원도 인제에서 당선된 첫 국회의원(민의원)의 꿈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군정(軍政)에 의해 정치 활동 금지자로 묶여 있다가 간신히 정계에 복귀한 상태였다.

정계의 최대 이슈는 그해 10월 15일로 다가온 제5대 대선의 승패였다. 군복을 벗어 던진 박정희가 민주공화당 후보가 나섰고, 이에 맞설 야권 단일 후보로 민정당의 윤보선 전 대통령이 추대됐다.

‘박정희 빨갱이’ 색깔론에 역풍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치열하게 경쟁을 벌인 세명의 ‘40대 기수론’ 주자들. 왼쪽부터 김영삼(당시 42세), 김대중(46세), 이철승(48세) 의원. [중앙포토]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치열하게 경쟁을 벌인 세명의 ‘40대 기수론’ 주자들. 왼쪽부터 김영삼(당시 42세), 김대중(46세), 이철승(48세) 의원. [중앙포토]

선거 판세는 치열한 접전 양상이었다. 그런데 윤보선 후보 측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전라도 여수 유세에서 윤보선 측 연설자가 48년의 ‘여순반란사건’에 박정희를 엮어 색깔론을 폈다.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가 민주주의자이고 누가 비민주주의자인가는 역사를 캐 보면 알 것이다.”

나, 김대중의 판단은 이랬다. 박정희가 여순반란사건과 관련해 공산주의자로 몰려 사형 위기에 처했던 일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반공을 국시(國是)로 내건 박정희를 좌익으로 몰자 호남 사람들은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과거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반대 세력을 숙청할 때면 공산당이란 낙인을 찍어 탄압했다. 그런 어두운 기억을 간직한 호남 유권자들에게 반발과 공포 심리를 자극했다. “멀쩡한 박정희를 빨갱이로 몬다”는 것이었다. 내가 윤보선 측에게 “왜 그런 짓을 하느냐. 색깔론으로 가면 표 다 도망간다”고 조언했지만 허사였다.

‘박정희 대통령’ 공신은 전라도

5대 대선은 대한민국 선거 역사상 가장 치열한 박빙의 선거였다. 박정희 470만 표, 윤보선 455만 표. 두 사람의 표 차이는 15만 표, 득표율 차이는 1.55%P에 불과했다. 최소 표 차이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박정희는 서울·경기·강원·충청에서 모두 졌다. 이긴 곳은 전라도와 경상도, 제주도였다. 특히 전라도에서 절반이 넘는 54%가 TK(대구·경북) 출신의 박정희를 찍었다. 표 차이가 35만 표(박정희 117만 표, 윤보선 82만 표)에 달했다. 색깔론이 영향을 미쳤을 테지만, 그때만 해도 영·호남 사이에 지역감정이 없었다. 15만 표 차이로 승리한 박정희에게 호남의 35만 표 차이가 없었다면, ‘박정희 대통령 시대’는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는 전라도 덕에 대통령이 된 셈이다.

‘마당발’ 권노갑…목포에서 재선

대선에 이어 11월 6대 총선을 위해 나의 발걸음은 목포로 향했다. 목포는 고향인 섬마을 하의도를 떠나 공부하고(목포상고), 해운 사업을 했던 나의 본거지다. 내 정치 인생의 동반자가 된 권노갑·김옥두 등 ‘동교동계 1세대’로 불리던 후배들의 도움이 컸다. 권노갑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목포의 마당발’이었다. 목포 시내를 다니면 ‘어이 자넨가?’ ‘어이 잘 지내는가?’ 하며 거의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목포의 아들”이라는 내 호소가 먹혔는지 재선 고지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 민정시대로 접어들었다. 경제 개발을 위한 자금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은 64년 1월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을 조속히 타결 짓겠다고 했다.

그해 3월의 봄날, 비밀에 부쳐진 ‘김종필-오히라 메모’의 존재가 신문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굴욕 외교’라며 격분한 대학생들이 전국에서 연일 시위를 벌였다.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62년 11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이 국교정상화의 조건으로 대일 청구권에 관해 합의한 내용이다. 일본은 한국에 무상 경제 협력 3억 달러 등 모두 6억 달러를 제공한다는 게 골자다.

한일회담 지지하자 “김대중은 사쿠라”

야당은 한일회담을 “매국”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국민 감정도 격앙된 상태였다. 회담을 지지하면 역적이 되는 분위기였다. 그때 ‘사쿠라’가 유행했다. 나도 찍혔다. 어느 날 시골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서울로 올라오셔서 질책하는데, 피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아버지) “네가 어떻게 정치를 하길래 사쿠라라는 소리를 듣는 게냐?”

(DJ) “나라를 위하는 길을 국민 비판이나 일시적인 오해가 두려워서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나는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에 대해 나름대로 연구한 뒤 소신을 갖게 됐다. “한일 관계 정상화는 당연히 추진해야 한다. 과거 영국이나 프랑스에 식민지를 당했던 나라들도 그들을 지배했던 나라와 수교했다. 우리 안보·경제·장래를 생각해서, 또 세계가 하는 관례에 따라 안 할 수 없다. 다만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하는 게 중요하다.”

민심 읽지 못한 ‘6·3사태’

64년 6월 3일 서울 광화문에서 학생·시민 5만 명이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6·3사태’다. 윤보선 민정당 총재는 “학생들과 궐기하겠다. 그 선두에 내가 서겠다”고 했다. 내가 만류했다. 막상 그날 밤 정부 계엄령이 선포되자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던 야당 강경파들은 일제히 몸을 숨겼다.

강경파들의 실제 목적은 박정희 정권에 흠집을 내고 쓰러뜨리려는 것이었다. 한일회담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국민 정서가 있었던 건 맞다. 하지만 ‘일본과 수교는 하지만 최대한 얻어내야 한다’는 게 진짜 민심이었다. 야당은 그런 민심을 읽지 못해 6·3사태를 기점으로 기세가 꺾였다.

67년 5월의 6대 대선에서 윤보선이 또 야당 후보로 나섰다. 지난 대선에서 아깝게 졌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뒤집힌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국민은 한일회담 무작정 반대 등 윤보선의 투쟁 노선을 보고 ‘이제 당신은 끝났다’고 판단했다. 그는 맥을 못 쓰고 패배했다. 110만 표 차이로 박정희는 손쉽게 재선했다.

이어진 총선에서 나는 목포에서 3선에 도전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목포에 내려왔다. 공무원 신분의 대통령은 선거운동을 못 하게 돼 있다. 그런데 목포역에 1만 명을 모아 놓고 ‘목포 발전’을 약속하는 연설을 했다. 노골적인 떨어뜨리기 공작을 극복하고 나는 세 번째로 금배지를 거머쥐었다.

김대중·김영삼·이철승 40대 기수론

60년대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 등장 이후 세계적으로 젊은 지도자의 출현이 큰 흐름이 됐다.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YS) 의원이 7대 대선에 출마하겠다며 ‘40대 기수론’을 선언했다. 역시 40대이던 나와 이철승 의원도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며 세대교체론에 가세했다. 당시만 해도 40대의 대권 도전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대권에 미련을 두고 있던 유진산 신민당 총재는 불쾌감을 표했다. “구상유취(口尙乳臭),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나는 정치적 미성년자들이 무슨 대통령이냐.”

40대 기수론을 거스를 수 없었다. 9월 29일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가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YS 대세론이 신문을 장식했다. 경선 당일 한 석간신문은 ‘김영삼 대선 후보 지명’이란 오보까지 낼 정도였다.

YS에 막판 역전…“박정희 막겠다”

1차 투표에서 48%의 득표율에 그쳐 YS의 압승 시나리오는 빗나갔다. 이어진 2차 투표에서 ‘다음 당수 선거 때 이철승을 민다’는 각서를 써주고 이철승계 표를 약속받았다. 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 52%의 득표율로 역전승이었다. 46세 대통령 후보의 탄생으로 새로운 정치의 서막을 열었다.

대통령 후보 지명 수락 연설을 했다. “나는 반드시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을 막아내는 동시에 민주적인 정권 교체를 실현시키겠습니다.”

나와 박정희의 운명적 만남이 시작됐다. 박정희의 3선 장기 집권에 성패가 걸린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어야 했다. 이 한 판의 결과에 따라 대한민국 역사가 요동칠 것이라는 두려움과 기대가 내 마음 속에 교차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158)은 중앙일보 프리미엄 디지털 구독 서비스 ‘더중앙플러스(The JoongAng Plus)(https://www.joongang.co.kr/plus)’의 연재 시리즈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더중앙플러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6회 〈박정희와의 대결과 DJ 돌풍〉이 이어집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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