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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와 평산책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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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방현 기자 중앙일보 내셔널부장
김방현 내셔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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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초에는 결혼하려 했는데 다 틀렸네요.” 경남 창원에 사는 20대 전세사기 피해자 김모씨의 하소연이다. 그는 2021년 2월 발라형 원룸 42㎡(약 13평)에 전세 입주했다. 보증금 8000만원을 냈다. 그런데 입주하고 나서야 빌라 건물이 경매에 넘어간 것을 알았다. 김씨 등 입주자는 금융권에 이은 후순위 채권자여서 보증금을 못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전세사기 피해가 수도권 못지않게 심각한 지역은 부산·경남이다. 부산시가 지난달 5일 문을 연 전세피해지원센터에는 지난 8일까지 피해 상담이 1479건 접수됐다. 경남도 전세피해지원센터에도 문의가 밀려들고 있다. 대부분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거나 집주인이 잠적한 것에 대한 호소다. 피해자는 대부분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청년층이다.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서울 중구 파이낸스빌딩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서울 중구 파이낸스빌딩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세사기의 발단은 2020년 7월 만든 임대차 3법(전월세 신고제, 전월세 상한제, 계약갱신 청구권)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중 전월세상한제는 전세 보증금과 월세 인상률을 5%로 제한하고, 계약갱신청구권은 세입자 임대차계약을 자동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 시행 전 입주자는 혜택을 보지만 나중에 집을 구하는 사람은 큰 피해를 봤다. 집주인이 시행 전에 전월세를 크게 올렸기 때문이다. 또 전세자금 대출 확대 등도 전세사기의 한 요인이 됐다.

당시 이 법이 통과되는 순간 여당인 민주당 원내대표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했다. 한 민주당 당 대표 출마자는 임대차 3법 강행 처리 비판에 “과열된 시장을 안정시키는 것은 집권당 책무”라고 말했다. 필자는 이들 3법이 시행되고 얼마 뒤 민주당 중진의원에게 “부작용을 모르고 법을 통과시킨 거냐, 알고도 그런 거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 중진의원은 “그 사람들(민주당 국회의원)은 부작용 같은 거 잘 모른다”고 했다. 이어 “다주택자는 돈만 밝히는 ‘나쁜 사람’이고 임차인은 불쌍한 사람이므로 무조건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민주당은 요즘 거리 곳곳에 ‘전세사기 피해 제보를 받는다’고 적힌 플래카드를 걸고 윤석열 정부를 규탄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정부 최고 책임자였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양산 사저 옆에 서점(평산책방)을 냈다. 양산은 지리적으로 부산, 경남 김해 등과 맞닿아있다. 귀를 기울이면 전세사기 피해자 절규가 들릴 듯한 거리다. 문 전 대통령이 이런 사람들에게 미안해하는 마음을 표현할 법도 하지만, 아직 그런 조짐은 없다. 그는 외려 자신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지난 5년간 이룬 성취가 한꺼번에 무너졌다”고 했다가 이 말을 지우기도 했다. 평산책방이 지난 과오와 앞으로의 희망을 함께 짚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