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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우의 밀리터리 차이나] 무너지는 푸틴의 제국… 中, 러시아에 무기 공급 않는 이유(上)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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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내년 대선을 앞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속은 그야말로 새까맣게 타고 있다.

3일이면 끝날 것이라던 전쟁은 1년을 훌쩍 넘겼고, 주요 전장에서는 매일 수백 명의 사상자가 보고되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을 더 강하게 몰아붙이고 싶어도 재래식 군사력은 거의 바닥이 났다. 2~3일 간격으로 한 번에 100발 가까이 퍼붓던 미사일 공격은 한 달 넘게 엄두도 못 내고 있고, 전장에서는 전차와 장갑차가 없어 보병들로만 구성된 일명 ‘스톰Z(Storm Z)’라는 부대 편제까지 등장했다.

'Z'가 새겨진 러시아 장갑차가 소련 시대 전차를 전시한 기념비를 지나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Z'가 새겨진 러시아 장갑차가 소련 시대 전차를 전시한 기념비를 지나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스톰Z’는 뭔가 굉장히 강해 보이는 이름이지만, 러시아군이 얼마나 심각한 장비 부족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증거다. 개전 초만 하더라도 러시아군은 대대전술단(BTG : Battalion Tactical Group)이라는 편제를 사용했다. 1개 BTG에는 전차와 장갑차, 자주포 등 140여 대의 기갑차량이 편제됐는데, 전쟁이 장기화하며 엄청난 기갑차량이 손실되자 러시아는 2023년 1월부터 돌격대(Assault Unit)라는 편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돌격대에 편제되는 전차의 수는 6대로 줄었고, 장갑차는 많아야 10대 내외였다. 같은 대대급 편제인데 기갑차량 숫자가 1/10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다.

3월부터 등장한 ‘스톰Z’는 전차나 장갑차가 아예 없는 보병 부대 편제다. 10명이 1개 조로 편성되며, 중화기 지원 없이 소총과 수류탄만 들고 돌격한다. 포병과 기갑 지원 없이 적의 방어선을 향해 달려가는 ‘알보병’들의 운명은 뻔하다. 그래서 러시아군은 격전지 바흐무트(Bakhmut)나 아우디이우카(Avdiivka)를 ‘고기 분쇄기(Meat grinder)’라고 부르고 있다.

간간이 등장하는 전차나 장갑차, 화포는 그야말로 고색창연(古色蒼然)하다. 개전 초만 하더라도 T-80BVM이나 T-90M과 같은 최신형 전차들을 자랑하던 러시아군은 지난해 가을부터 1960년대 초반에 생산된 T-62 전차를 끌고 나오더니, 지금은 1948년에 생산된 T-54 전차를 전선에 투입하고 있다. 포병부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스탈린의 오르간’이라 불렀던 ‘카튜샤(Katyusha)’ 다연장로켓과 ZiS-3 76.2mm 야포를 받고 사용 매뉴얼이 없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일부 부대는 소총조차 못 받거나 2차 대전 때 썼던 ‘모신-나강(Mosin-Nagant)’ 볼트액션 소총을 받고 있다.

1985년 기차에 실려 헝가리로 향하는 T-55 전차. 아래는 최근 아르세니예프에서 러시아 서쪽으로 향하는 T-54/55 전차들. [citeam]

1985년 기차에 실려 헝가리로 향하는 T-55 전차. 아래는 최근 아르세니예프에서 러시아 서쪽으로 향하는 T-54/55 전차들. [citeam]

2022년 2월 전쟁 발발 당시 러시아군은 ‘장부상’으로 현역 전차 3천여 대, 예비용 전차 1만여 대를 보유하고 있는 전차 대국이었다. 특히 3세대 전차로 분류되는 T-80과 T-72는 치장 물자만 각각 3천 대와 7천 대 이상이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우크라이나군의 전체 전차 보유량의 10배를 훌쩍 넘는 엄청난 양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들 전차를 치장 창고에서 꺼내 일선으로 복귀시키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부분의 예비 전차는 소련 붕괴 이후 야적장에 30년 넘게 방치돼 사용 불가능할 정도로 녹슨 상태였고 현역 전차들 역시 극심한 비리와 부정부패로 인해 관리가 되지 않아 가동 중단인 차들이 태반이었다. 러시아 수뇌부는 지난해 5~6월에야 이러한 상황을 인지했고, 그제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Dmitry Medvedev) 국가안보회의 부의장, 안드레이 카르타폴로프(Andrey Kartapolov) 국가두마 국방위원장 등이 책임자를 숙청하고 직접 장비 복원 사업을 진두지휘하고 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극심한 기갑 장비 부족에 시달리며 ‘알보병 군대’로 전락한 러시아군이 그나마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날씨 덕분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서부지역, 벨라루스에는 봄과 가을에 많은 눈이나 비가 내려 대지가 뻘밭으로 변하는 라스푸티차(Rasputitsa) 현상이 발생한다. 러시아어 라스푸티차(распутица)는 의역하면 “길이 없다”는 뜻이다. 라스푸티차 기간 중에는 해당 지역이 일반 차량은 물론 무한궤도를 장착한 전차나 장갑차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진흙탕으로 변한다. 이 라스푸티차는 13세기 몽골군의 침공으로부터 러시아의 공국들을 지켰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때도 프랑스 대군의 발목을 잡아 러시아를 구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을 돈좌(頓挫)시켜 전쟁의 흐름을 바꿨다.

지난해 10월 우크라이나 동부 하르키우주 이지움에서 러시아군 장갑차와 탱크가 진흙탕에 갇혀 꼼짝 못하고 있다. 가을장마로 동부와 남부전선의 평원이 거대한 진창으로 변하는‘라스푸티차’현상 탓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군 양측 모두가 작전 수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10월 우크라이나 동부 하르키우주 이지움에서 러시아군 장갑차와 탱크가 진흙탕에 갇혀 꼼짝 못하고 있다. 가을장마로 동부와 남부전선의 평원이 거대한 진창으로 변하는‘라스푸티차’현상 탓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군 양측 모두가 작전 수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올해 초부터 서방 세계의 엄청난 무기 지원을 받아 최소 12만, 최대 20만 명의 대군과 2천 대 이상의 전차·장갑차로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이 4월 하순 현재 알보병 상태의 러시아군 진영을 공격하지 않는 이유도 기갑차량이 움직일 수 없는 라스푸티차 기간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지역의 라스푸티차는 4월 말, 늦어도 5월 초에 끝난다. 5월 초에서 중순이 되면 진흙탕이 됐던 땅들이 마르면서 조금씩 단단해지기 시작하는데, 서방 싱크탱크들은 우크라이나군의 대반격이 이때 시작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의 대공세가 짧으면 2~3주, 늦어도 한 달 후에는 시작될 게 자명한데, 이에 대응할 무기가 없는 러시아는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군의 총공세에 맞서기 위한 무기와 탄약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러시아의 동맹 또는 우방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들은 러시아에 충분한 무기를 공급할 수 있을 정도의 생산 능력이 없다. 벨라루스는 구소련 때부터 벨라루스 각지에 방치됐던 장비들을 조금씩 복원해 러시아군에 전달해 주는 정도다. 베네수엘라에는 무기 생산을 위한 인프라가 거의 없으며, 그나마 조금 친분이 있는 인도는 서방 세계와의 관계 때문에 러시아에 무기를 공급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북한이 러시아 바그너그룹에 무기를 일부 공급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북한제 재래식 무기는 중동에서도 그 품질이 조악하기로 악명이 자자해 러시아 입장에서는 받아서 쓰는 것이 되려 해가 될 수 있다. 정치·외교적인 상황이나 무기 생산 능력 전반을 고려했을 때, 러시아와 친분이 있는 나라 가운데 러시아가 필요한 만큼의 무기를 적시에 공급해 줄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이다.

바로 중국이다.

러시아는 지난해부터 중국에 무기를 공급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해 왔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중국 허난성 정저우 공항에서는 러시아 모스크바를 오가는 러시아 공군 소속의 An-124 수송기와 IL-76 수송기가 자주 식별됐는데, 해당 수송기들을 통해 대량의 전투복과 방탄복, 방탄헬멧, 무전기가 러시아군에 공급된 것이 확인되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중국은 그 이상의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필요한 것은 전차와 장갑차 그리고 각종 포탄이었고 러시아는 다양한 루트를 통해 중국에서 무기를 수입하고자 했지만, 중국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다급한 러시아는 지난 3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모스크바로 초청했다. 양국 정상은 ‘신시대 전면적 전략협력동반자 관계 심화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미국과 서방 세계를 향해 강도 높은 비난을 쏟아내며 ‘공동전선’을 천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대러 무기 판매는 성사되지 않았다. 정상회담을 전후해 미국 고위 관료들과 각 기관에서 중국이 러시아에 무기를 공급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지금까지 전선에서 중국제 군용 살상 무기가 식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중국 탱크. [사진 셔터스톡]

중국 탱크. [사진 셔터스톡]

중국이 러시아에 무기를 공급하지 않는 이유는 중국이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과 러시아 실로비키 세력은 본질적으로 공산·전체주의를 추종하는 집단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공산·전체주의 세력의 종주국 지위를 놓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여온 경쟁자다. 중국과 러시아는 청나라·제정러시아 시대부터 잦은 전쟁을 벌였던 원수지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동반자가 됐지만,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소련이 1인 독재 체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자 다시 관계가 틀어졌다.

특히 중국이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아사자가 속출하는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소련은 각종 군사 무기에 대한 기술 공급의 대가로 중국에 돈과 식량을 요구해 중국인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때부터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한 양국 관계는 1969년 국경 분쟁 이후 완전한 적대 관계가 됐다.

소련 붕괴 이후 양국의 관계는 완전히 바뀌었다. 중국은 급속히 성장하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과거 소련이 차지했던 ‘미국의 맞수’ 자리를 차지했지만, 러시아는 오랫동안 정치·경제적 혼란에 시달리며 국력이 크게 쇠퇴했다. 푸틴 집권 이후 ‘오일 머니’ 덕분에 국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 데 성공한 러시아 집권 실로비키들은 초강대국이었던 옛 소련의 향수를 자극하며 국내 정치적 기반을 강화해 나갔다. 하지만 이들에게 중국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옛 소련 정보기관·군부 인사들이 중심이 된 실로비키들의 머릿속에는 소련 시절의 세계관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들에게 중국은 그저 소련의 아류일 뿐이었다.

2023년 현재 중국과 러시아의 국력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크게 벌어져 있고 지금의 러시아는 중국의 도움이 절실하지만, 아직도 자신들이 ‘상전’인 줄 아는 실로비키들의 ‘인지부조화’는 지난 3월 중·러 정상회담 당시 중국의 감정을 자극해 결국 ‘양국 무제한 협력’ 합의를 없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실로비키들은 지난 3월 21일, 크렘린궁을 찾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대단히 심각한 ‘의전 실수’를 저질렀다. 당시 환영식은 크렘린궁 안의 가장 거대한 홀인 ‘게오르기옙스키홀(Georgievski Hall)’에서 열렸는데, 시 주석은 100m가 넘는 이 홀을 걸어 들어가 홀 안쪽 깊숙한 곳에 마치 황제처럼 서 있는 푸틴에게 다가가야 했다.

 러시아를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3월 21일(현지 시각) 모스크바 크렘린궁 행사장에 입장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레드 카펫 반대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러시아를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3월 21일(현지 시각) 모스크바 크렘린궁 행사장에 입장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레드 카펫 반대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게오르기옙스키홀의 문이 열리고 자신의 눈앞에 마치 제후국의 왕이 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길과 같은 무대가 펼쳐진 것을 보며 100m 넘게 걸어갔던 시 주석은 걸어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지난해 12월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을 때 시 주석이 탄 차량 하차 지점까지 달려와 뙤약볕 아래에서 시진핑을 맞이했던 빈 살만 왕세자의 모습이 홀 안쪽에 서 있는 푸틴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조됐을 것이다.

러시아는 푸틴과 시진핑이 함께 발표한 ‘신시대 전면적 전략협력동반자 관계 심화에 관한 공동성명’도 발표 사흘 만에 엎어버렸다. 당시 중·러 양국은 핵보유국이 자국 영토 밖에 핵무기를 배치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었는데, 러시아는 사흘 뒤에 벨라루스 핵무기 전진 배치를 선언하며 중국과의 약속을 깨버렸다. 중국도 며칠 뒤 푸충(傅聪) 유럽연합 주재 중국 대표부 대사가 나서서 “러시아와의 무제한 협력 선언에서 무제한이라는 단어는 그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면서 러시아와의 협력에 선을 그었다.

중국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러시아가 주제를 모르고 자존심을 세웠다가 겨우 얻은 협력의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 것이었다. 물론, 러시아가 이러한 실책을 범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선 상황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러시아는 중국에 또다시 도움을 청했다.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이 직접 나서 중국 리상푸(李尚福) 국방부장을 모스크바로 초청한 것이었다.

내일 (下)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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