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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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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밥 딜런과 존 바에즈의 포크송 역시 베트남 전쟁 시대를 살아간 미국 청년의 저항 문화를 상징한다. 딜런은 '바람만이 아는 대답'으로 한국에 소개된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에서 "얼마나 더 많은 포탄이 터져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끝날까, 얼마나 더 무참히 죽어가야 뉘우치게 될까"라고 노래했다.

랩과 힙합 역시 '저항'이라는 옵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70년대 말 뉴욕의 흑인 클럽과 거리에서 발생한 랩은 80년대 가난한 흑인들의 불만을 대변하면서 언더그라운드를 석권했다. 빈민가 흑인들이 사회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랩.댄스.패션 등으로 표출한 것이 힙합이다.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원래 록이나 포크는 '저항'인데, 한국에는 저항이 없다고.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하는 신중현의 '미인'은 록도 아니라고. 통기타 두들겨서 돈과 인기를 차지한 포크가수는 '물 좀 주소'의 한대수와 '아침이슬'의 김민기가 아니라 '왜 불러'의 송창식이 아니었느냐고.

'록=저항'의 공식을 기도문처럼 왼 적이 있다. 전두환 정권 시절, 캠퍼스 구석구석 최루탄 냄새가 마를 날 없던 이념의 시대에 대학을 다닌 '386'은 '스모키'가 부른 '리빙 넥스트 도어 투 앨리스(Living Next Door to Alice)'의 사랑스러운 멜로디를 솔직하게 좋아할 수 없었다.

분명 록의 전성기는 지나갔고, 젊은이들은 힙합 리듬에 몸을 내맡겼다. 한국의 랩.힙합.브레이크댄스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거기에 저항은 없다. 대신 넘실대는 리듬이 젊음의 에너지를 표현하고 있다. 리듬뿐인 힙합을 힙합이라고 해도 좋은가. 그런 힙합을 즐기는 그들이 잘못된 것인가.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동국대 국문학과는 강원도 낙산에서 여름창작교실을 연다. 86년 여름, 거기서 한 여학생이 발표한 짧은 서정시를 남학생이 맹렬히 공격했다. "이런 시에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느냐"고. 그때 즐거운 웃음소리를 들었다. 동문 시인 신경림 선생이었다. 그는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시가 반드시 뭘 주장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 완성된 예쁜 시, 잘 읽었습니다…."

'농무'로 유명한, '참여시인' 신경림 선생의 감상평에 모두 놀랐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오늘 그의 '깊이'를 깨닫는다. 신 선생은 예술가였고 그에게 시는 어찌 됐든 시여야 했으며, 저항이나 참여는 나중 문제였다.

지금은 거리에서 힙합을, 청와대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시대다. 386의 록이고 포크였던 '임을 위한 행진곡'은, 모두가 어깨를 겯고 함께 전진하며 가슴으로 부른 노래다. 우두커니 서서, 아니면 자리에 앉아 혼자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대학 시절, 이 노래가 군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이제 아무도 '타는 목마름으로'에서처럼 숨죽여 흐느끼며 뒷골목 담벼락에 '민주주의'라고 쓰지 않는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는 외침은 끊임없이 새롭지만, 전진은 간데없고 입으로만 외치는 사람이 많으니 늘 가슴이 뜨겁지는 않다. 이 사람들이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나중에 전국 노래자랑 같은 데서 따로 들었으면 좋겠다.

허진석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