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약국에는 마을 사람들의 푸념을 넉넉히 받아주던 약사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의사처럼 너무 권위적이지도, 간호사처럼 너무 보조적 이미지도 아니고 적당한 권위와 신뢰로 '선생님'이라 부르기 딱 좋은 존재였지요. 미모의 여 약사라면 동네 총각들의 흠모를 받는, 최고 신부감 대우도 받았습니다. 물론 이런 풍경은 낯모르는 이들이 줄지어 대기하다 이름이 불려 약 봉투를 받아들고 나가면 그뿐인 요즘 대형 약국들과는 아주 다릅니다.
이처럼 아스라한 옛날 동네 약국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들이 몇 편 있습니다. 약국이 유사가족인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 되고, 약사가 단지 약을 파는 게 아니라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상처에 예민한 존재로 나오는 영화들 말입니다.
30일 개봉하는 로맨스물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의 약사 한석규는 손님으로 온 짝퉁 디자이너 김지수와 사랑에 빠집니다. 한석규는 처방전 없이 약을 지어주기도 하고, 수면제를 달라는 손님에게 캔 맥주를 권하기도 합니다.
송윤아와 설경구가 엇박자의 오래된 로맨스를 펼친 '사랑을 놓치다'에서 송윤아는 적당히 지적인 이미지로 약사 캐릭터에 잘 어울렸고요. 폐광촌을 무대로 한 '꽃피는 봄이 오면'의 장신영은 동네 총각들의 마음을 흔드는, 시골 여 약사라는 판타지를 제대로 구현했지요. 강동원이 순진한 시골 약사로 나왔던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서는 약국에 들르는 마을 사람들 전부가 강동원의 연애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고 보면 예전 동네 약국이나 약사의 이미지를 내세운 영화들은 뭔가 아련한 정서를 공유했다는 공통점이 있네요. 시대 배경은 지금이지만 화끈한 인스턴트식 사랑에 밀린 소심한 사랑과 삶의 방식을 보여 주었죠. 약을 처방하는 게 업이지만 정작 자신의 사랑이나 상처에 대해서는 처방을 잘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하고 상처 많은 인물이라는 것도 공통점입니다. 또 지금은 사라져 가는 공동체적 생활방식을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
약과 함께 정을 팔았던 옛날 동네 약국이 갑자기 그리워지는데요, 이렇게 소소한 재미와 정서를 전해 주는 것도 영화의 좋은 점이 아닐까 합니다.
양성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