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5개, 사탕 1봉지 슬쩍…배고픈 '노인 장발장' 자꾸 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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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이미지.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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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벌이 어려운 노인, 생계형 절도 범죄 빠져

지난해 10월 청주시 상당구 한 야채 가게에서 한 개 1000원 하는 사과 5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A씨(81)가 가게 주인이 한눈을 판 사이 진열된 사과를 몰래 비닐봉지에 넣었다. 결국 A씨는 경찰에 붙잡혔다. 하지만 조사 과정에서 딱한 사정이 알려졌다. 그는 기초생활보장수급자로 마땅한 직업이 없었다. 청각장애도 갖고 있었다.

앞서 같은 해 5월 충북 증평읍에서 69세 노인 B씨가 먼지떨이를 훔쳤다가 검거됐다. 스크린 골프장 앞 파라솔 위에 놓인 4000원짜리였다. B씨는 곧 훈방 조처됐다. B씨 역시 기초생활수급자에 무직이었다. 경찰은 동종 전과가 없고, 피해자와 합의한 점을 고려해 이런 판단을 내렸다.

고물가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취약계층이 증가하면서 절도 범죄에 손을 뻗는 노인이 늘고 있다.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절도 범죄자 검거 현황은 2017년 1만448건에서 2018년 1만1004건, 2019년 1만3960건으로 증가했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린 2020년 1만5060건, 2021년 1만6892건으로 최근 5년 동안 증가 추세다.

전국 절도 범죄가 2017년 10만5695건에서 2021년 8만5687건으로 오히려 줄어든 것과 반대 양상이다. 이 기간 65세 이상 고령자 절도 범죄는 61%, 70세 이상은 73% 늘었다. 전체 절도범죄에서 65세 이상 노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9.8%에서 19.7%로 10% 가까이 늘었다. 경제 위기에 내몰린 노인이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소액 절도까지 손을 댄 사례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경찰 관계자는 “고령 어르신들 소액 절도 사건이 최근 부쩍 많아졌다”며 “배가 고파서 과일을 훔치는 등 생필품 절도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충북의 경우 절도 범죄로 입건된 65세 이상 노인은 2018년 346명에서 2020년 464명, 2022년 594명으로 해마다 늘었다.

 지난 2월 서울 서대문구 전통시장에서 한 시민이 빈 장바구니로 시장을 나서고 있다.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 없습니다. 뉴스1

지난 2월 서울 서대문구 전통시장에서 한 시민이 빈 장바구니로 시장을 나서고 있다.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 없습니다. 뉴스1

70세 이상 절도범죄 4년간 73% 증가

경찰청 관계자는 “20만원 이하 소액 절도 사건은 전과가 없거나 5년 내 같은 범죄가 없으면 경미범죄심사위원회를 통해 대부분 감경 처분을 받는다”고 말했다.

노인 절도 범죄 증가와 함께 눈에 띄는 현상은 1만원 이하 소액 절도 건수가 늘었다는 점이다. 경찰청 범죄통계를 보면 7개(1만원 이하~10억원 초과) 구간으로 구분한 절도범죄 피해액 사건 중 유독 1만원 이하 소액 범죄만 최근 5년 새 늘었다. 피해액 1만원 이하 절도범죄는 2017년 1만1933건에서 2021년 1만4501건으로 21.5% 증가했다. 이 기간 고령 절도범죄 건수가 늘어난 것을 고려하면 이른바 소액 절도를 저지른 ‘장발장 노인’이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소액 절도 범죄는 생계형 사례가 많다. 지난해 12월 경남 밀양에서는 70대 C씨가 우유와 아몬드 등 1만7000원어치를 훔쳤다가 붙잡힌 사건이 발생했다. 마트 주인이 재고 정리를 하다 물품이 빈 것으로 보고 신고했다. C씨는 독거노인으로 마땅한 소득 없이 생활하다 배가 고파서 이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고물가로 짠물 소비가 이어지며 1+1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이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없습니다. 연합뉴스

고물가로 짠물 소비가 이어지며 1+1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이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없습니다. 연합뉴스

설탕 1봉지, 사탕 1봉지 훔쳤다가 벌금형 

2020년 대전 시내 한 할인마트에서 접착제 1개, 홍삼 캔디 1봉지, 설탕 1봉지 등 1만원 상당 물품을 훔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80대 D씨는 벌금 50만원을 선고받았다. D씨는 미리 준비한 검은색 비닐봉지와 품속에 물품을 넣고, 우유만 계산하려다 들통났다고 한다. 재판부는 “피해 규모가 크지 않고, 생필품이나 식품을 절취한 생계형 범죄”라며 “설탕은 피해자에게 반환됐고,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모두 고려해 양형했다”고 판시했다.

지난해 4월 서울 한 의료 매장에서 정장 상의를 몰래 훔친 E씨(78)는 벌금형 100만원을 선고받았다. E씨가 훔친 정장 상의 시가는 10만원이었다. 2019년 11월 대형상점 식품코너에서 커피·율무차·라면·소시지 등 식료품 1만7330원 상당을 훔쳐 달아나는 등 혐의로 재판을 받은 70대는 2020년 재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F씨는 시금치와 단무지·반찬통 등이 들어있는 40만원 상당 등산 가방을 들고 달아나기도 했다.

엄태석 서원대 교수(복지행정학과)는 “노인 절도 범죄가 늘어난 원인이 인플레이션에 따른 생활고로 인한 것인지, 악의적인 절도 범죄가 늘어난 것인지 분석이 필요하다”며 “생계형 절도 범죄는 처벌 외에 재발 방지를 위한 지자체 지원이 동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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