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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 유행한 이 약 주목…강남 학원가 '마약테러' 타깃 이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서울 강남 학원가에서 지난 3일 일어난 마약 음료 사건으로 대치동 등 강남 학원가가 발칵 뒤집혔다. 불특정 다수의 학생들을 겨냥한 사건인 만큼, 학원과 학부모는 물론 학생들도 크게 놀란 모습이었다.

“아이들 등하원시간 어쩌나”…긴장 감도는 학원가

경찰은 2인조로 움직인 일당 4명 중 3명을 검거하고 나머지 1명을 쫓고 있다. 이들은 구매 의향을 조사한다며 피해 학생들로부터 부모님의 휴대폰 번호를 받아갔는데, 피해 학생의 학부모들은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자녀가 마약을 복용한 걸 신고하겠다”는 협박 연락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사진 서울강남경찰서

경찰은 2인조로 움직인 일당 4명 중 3명을 검거하고 나머지 1명을 쫓고 있다. 이들은 구매 의향을 조사한다며 피해 학생들로부터 부모님의 휴대폰 번호를 받아갔는데, 피해 학생의 학부모들은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자녀가 마약을 복용한 걸 신고하겠다”는 협박 연락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사진 서울강남경찰서

6일 만난 청담동 소재 한 국어학원 관계자는 “원래도 CCTV를 다 설치하고 저학년은 부모님이 와야만 인계하는 등 안전에 신경써왔지만 아이들을 한 번 더 하원지도하려 한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대치동 범행 장소 근처의 입시학원 유리문에는 “절대 다른 학생들에게 (이 음료를) 음용케 하지 말고 신속히 신고해달라”며 경찰이 음료 사진과 함께 배포한 가정통신문이 붙었다. 전날에는 피의자들이 다녀간 학원가로 취재진들이 몰리며 소동이 일었다. 학원 측이 "업무방해"라며 경찰과 취재진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이날 오후, 하원하는 자녀들을 마중 나온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불안이 감돌았다. 대치동 한 학원 앞에서 만난 윤모(47)씨는 “엄마들끼리도 난리다. 중고등학생들을 맨날 데리고 가고 오고 할 수도 없고 어떡하나”라며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혼자 학원 다니는 애들이 많은데, 친구들이랑 다니면 호기심에 뭐든 한 번씩들 해볼 것 같아 불안하다”고 했다. 중학생 학부모 유모(45)씨는 “최근에는 납치 사건도 있었는데 무서워서 어떻게 사나”라며 “여기 대치동 아이들 공부 시키는 곳에서 집중력 이야기를 하면서 마약을 나눠줬다는 게 너무 악의적이다”라고 말했다.

5일 오후 7시쯤 서울 수서경찰서 직원들이 은마아파트사거리 근처 학원가에서 순찰을 돌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대치동에는 총 1260여개의 학원이 밀집해 있다. 최서인 기자.

5일 오후 7시쯤 서울 수서경찰서 직원들이 은마아파트사거리 근처 학원가에서 순찰을 돌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대치동에는 총 1260여개의 학원이 밀집해 있다. 최서인 기자.

경찰은 학원가 순찰에 돌입했다. 지난 5일 오후 6시 30분, 학생들의 등하원 시간에 맞춰 경찰관들은 대치지구대를 나섰다. 이들은 은마아파트사거리와 한티역 앞까지 누비며 혹시 모를 유사 범죄가 벌어지는지 살폈다. 중·고등학교가 있는 언덕길을 올라가 교문 앞을 훑어보고 되돌아 내려오기도 했다. 곳곳에서는 우산을 받쳐 쓴 기동대원들이 오가며 “특별한 거 있습니까?”라며 상황을 공유했다. 6일부터는 목동·중계동·창동 등 다른 학원 밀집지역에서도 각각 기동대 1개 제대(20~30명)와 관할 경찰서 직원들이 합동 순찰에 나선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일회성 복용’이 심각한 중독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김선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독성학과장은 “소량 복용으로 추정되는데, 병원에서 수액을 맞고 소변으로 배출하는 등 치료를 잘 받으면 건강상 문제는 없다”며 “1회 투약만으론 금단 증상이 이어질 가능성이 낮다”고 조언했다.

10여년 전 강남서 유행했던 ‘ADHD약’ 노렸나

경찰이 지난 3일 오후 6시쯤 필로폰과 엑스터시 성분이 든 액체를 집중력과 기억력 향상에 좋은 음료로 속여 대치동 학원가에서 고교생 2명에게 먹인 일당을 쫓고 있다고 4일 밝혔다. 사진은 용의자들이 실제 고교생들에게 먹인 '메가 ADHD' 상표의 음료. 사진 서울강남경찰서

경찰이 지난 3일 오후 6시쯤 필로폰과 엑스터시 성분이 든 액체를 집중력과 기억력 향상에 좋은 음료로 속여 대치동 학원가에서 고교생 2명에게 먹인 일당을 쫓고 있다고 4일 밝혔다. 사진은 용의자들이 실제 고교생들에게 먹인 '메가 ADHD' 상표의 음료. 사진 서울강남경찰서

피의자들이 범행 장소로 강남 학원가를 점찍은 데는 강남 일대에서 10여 년 전부터 향정신성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치료제 ‘메틸페니데이트’ 등이 유행했던 게 영향을 미쳤을 거란 분석이 나온다. 뇌 각성제로 쓰이는 메틸페니데이트는 ‘공부 잘하는 약’·‘집중력 높여주는 약’ 등으로 과대 포장돼 학부모들과 수험생들 사이에서 오남용되어 온 약이다. 실제론 ADHD 환자 외엔 큰 효과가 없다.

피의자들이 음료에 붙여둔 조악한 상표도 ‘메가 ADHD’로, 학원가에서 ADHD 치료제가 자주 쓰이는 분위기를 범죄에 악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치동에서 만난 한 중학생은 “그런 게(집중력 약) 인스타 광고에 많이 뜬다”고 했고, 또 다른 중학생은 “약국에서 사먹는 애들이 종종 있다”고 말했다. 이범진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는 “메틸페니데이트는 중추신경에 작용하는 의료용 향정신성 물질이다. 처방이 필요한데도 적절한 관리가 이뤄지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범죄가 “마약이 흔해진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마약 수사 경력 20년 이상의 한 경찰관은 “묻지마 폭행, 묻지마 살인은 봤어도 이런 ‘묻지마 마약’은 처음”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김필여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이사장은 “이번 사건은 유흥가도 아닌 학원가에서 10대만 노린 악질적 범죄”라며 “본부 차원에서 예방교육을 강화하는 등 대응 방안 강구할 예정이다. 식약처, 교육부도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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