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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노적봉이라도 쌓자는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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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양곡관리법 개정을 밀어붙인 민주당의 주요 명분은 식량안보다. 이재명 대표는 “양곡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는 식량안보 전략 포기 선언”이라고 했다. 민주당이 생각하는 식량안보란 어떤 걸까. 한반도 주변에 전쟁이 나서 갑자기 식량 수입이 뚝 끊어지는 상황을 상정한 걸까.

한국의 쌀 자급률은 90%가 넘는다. 나머지 10%도 쌀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WTO(세계무역기구) 규약에 따라 의무 수입하는 TRQ(저율관세할당물량) 때문이다. 고립된 성(城)을 놓고 벌이는 사극 전투 장면을 너무 열심히 본 탓일까. 민주당의 식량안보론은 시대착오적이다. 우리 국토가 좁다지만 성 한 채와 비교할 수는 없다. 식량 수입이 위협받을 정도의 극단적 상황이라면 한국이 거의 전량 수입하는 에너지는 더 위험하다. 염화칼륨·요소 같은 비료 원자재도 끊어질 가능성이 높다. 농지가 널려도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쌀이 넘쳐도 유통할 방법이 사라진다.

민주당의 시대착오 식량안보론
국가를 좁은 성쯤으로 여기는 듯
정책 정당으로서 밑바닥 드러내
식량안보 강국 어딘지부터 보라

2005년 ‘공공비축제’ 도입 이후 정부는 매년 6000억~1조원을 햅쌀을 사는 데 쓴다. 이렇게 쌓아둔 쌀은 3년쯤 지나면 가공용으로 헐값에 넘어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보관 비용으로 매년 수천억 원이 들어간다. 쌀값이 떨어지면 정부가 물량을 사들이는 ‘시장 격리제’도 운영한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공공비축제 도입 이후 17번의 시장격리를 위해 23조원이 들었다. 다 국민 세금이다. 식량안보를 위한 보험료쯤으로 생각하자고? 보험료는 적정 요율이란 게 있다. 위험 대비랍시고 밑도 끝도 없이 보험을 늘리는 건 어리석은 살림꾼이나 할 짓이다.

사실 민주당이 식량안보의 개념을 정확하게 아는지조차 의문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에서 발표한 2022년 세계식량안보지수(GFSI) 1위 국가는 핀란드다. 동토의 이 나라가 식량 자급률이 뛰어나 1위를 했을 리는 없다. 핀란드는 구매능력, 공급능력, 식품안전 및 품질, 지속가능성 등 평가 네 부문 모두 상위권이다. 식량 수입을 위한 높은 경제력과 안정적 네트워크가 있고, 그 위에 소비자 기호와 건강을 고려하는 식량 관리 체계까지 골고루 갖췄다는 뜻이다.

식량안보를 자급률로만 따지는 건 좁은 시야다.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자급률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세계 곳곳에서 들여오는 다양한 식재료와 맛을 즐길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다. 식량자급률이 80%에 달했던 1970년대 말 우리 식탁이 지금처럼 풍성했던가. 자급률이 90%에 이른다는 북한의 만성적 식량 부족은 또 어떤가. 식량안보를 칼로리의 보급으로만 따질 수는 없다. 소득 4만 달러를 바라보는 국가라면 영양 균형, 식습관, 기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대규모 곡물 생산국 대신에 아일랜드·노르웨이·네덜란드·스웨덴 같은 북유럽 고소득 국가가 식량안보 10위권에 포진한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GFSI 순위에서 한국은 39위다. 만족스럽진 못하지만, 비(非)농업 국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 비관할 수치도 아니다. 한국의 순위를 떨어뜨린 요인 중 하나는 높은 수입 농산물 관세다. 이 부문에서 한국은 0점을 받았다. 수입쌀 관세율 513%가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선택이었다고 치자. 하지만 국제가보다 6배나 비싼 쌀이 우리 농업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것만은 직시해야 한다. 쌀 산업에 지원이 집중되다 보니 벼농사는 100% 가까이 기계화됐다. 정부가 수매해주니 판로도 걱정할 필요 없다. 큰돈은 못 벌어도 ‘쉬운 농사’가 되다 보니 고령의 농민들이 논을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바람에 부농의 꿈을 꾸는 젊은 상품작물 재배자의 밭일은 더 힘들어졌다.

우리 식생활과 기후가 비슷한 일본은 GFSI 6위다. 일본의 식량자급률은 한국과 큰 차이 없다. 그런데도 상위를 점한 것은 월등한 수입 역량 때문이다. 일본은 2000년대부터 미쓰이·마루베니·미쓰비시 등 종합상사들이 산지의 곡물엘리베이터(곡물의 저장·이송 인프라)를 확보해왔다. 일본 농협 격인 젠노(全農)만 해도 60개를 확보했다고 한다. 한국은 이제 겨우 2개를 확보한 상태다.

성안에서 노적가리 쌓듯 든든하게 식량부터 확보해놓자는 전략은 시대착오적이다.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을 자급하자는 생각만큼 터무니없다. 한국이 반도체 강국이 된 것은 개방과 네트워크 활용 덕분 아니던가. 물론 수입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식량 자급률을 일정 정도로 올리는 건 필요하다. 그러나 이미 자급률 100% 가까운 쌀은 아니다. 밀·콩 같은 자급률 낮은 곡물로 정책의 눈을 돌려야 한다.

민주당으로선 거부권을 행사한 윤석열 대통령이 농심의 덫에 걸려들었다며 쾌재를 외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책 정당으로서 역량 바닥을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다. 대통령실과 여당은 쌀 농가의 불만을 다독이며 전체 농업 발전의 밑그림을 다시 그려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확실한 건 “밥 한 공기 더 먹자”는 한심한 대책으로는 길이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