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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문동은이 필요 없는 트럼프 응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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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이제 미국인들은 초법적인 사적 복수극에 당분간은 흥미를 잃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 가는 마피아 수법의 고수인 트럼프 전 대통령이 드디어 기소되었기 때문이다. 연진이를 잡은 ‘더 글로리’의 문동은 대신에 이 일을 브래그 맨해튼 지방 검사장이 해냈다. 트럼프가 진짜 두려워하는 건 이건 끝의 시작이 아니라 시작의 끝이라는 점이다. 법률적으로 다툼의 소지가 있는 이번 선거자금법 위반 혐의와 달리 앞으로 조지아 검찰청, 법무부 특검 등의 수사는 누가 보더라도 중대 범죄 혐의가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트럼프가 그의 극우 팬덤들에게는 박해받는 메시아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그간 무기력했던 그의 캠페인은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트럼프의 2024년 당선까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법치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트럼프와 같은 조폭 정치인이 무서워 법의 적용을 회피하기 시작하면 그 이상의 악당이 판치는 세상이 온다.

트럼프 당선 위험을 각오한 기소
강자를 시민이 견제하는 게 법치
공화적 법치 등 기본 갖춘 사회는
‘글로리’같은 사적 복수가 불필요

한국에는 조만간 중국이 미국을 대체한다고 믿는 전문가들이 제법 있다. 나는 ‘매우 오래 걸린다’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자의적 통치가 아니라 법적 지배를 통한 자유의 보장을 중국이 미국보다 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소수 엘리트가 지배하는 미국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모델은 수명이 다했지만 그래도 적법한 절차 등의 브레이크 장치까지 완전히 망가진 건 아니다.

이번 트럼프 기소를 보면서 나는 대한민국에 새로운 가치연합의 세력이 나오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 이는 자기 진영의 이익보다 법적 과정과 결과의 공정성 및 이를 위해 강자에 대한 시민의 견제를 더 중시하는 노선이다. 우리는 이를 공화주의적 법치라 부른다. 대한민국의 다음 단계로의 새로운 도약을 선도하고자 하는 세력이라면 지금은 자신부터 기본을 지키는 게 새로움이다. 그리고 지금 현존하는 세력들은 이를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번 트럼프 기소 과정을 보면 지켜야 할 기본이자 새로운 노선의 단초가 보인다.

브래그 맨해튼 지검장은 그간 한국 검찰의 관행과 달리 증거에 기반을 둔 신중함으로 기본을 지키고 있다. 그간 빨리 기소를 추진하자는 하급자들의 빗발치는 요구와 항의 사표 파동에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길고 지루한 과정을 통해 단단한 증거가 확보되자 그는 비로소 움직였다. 사법적 절제와 적법한 절차에의 믿음이야말로 민주공화국의 기본 중 기본이다.

브래그 맨해튼 지검장은 한국과 달리 대통령 눈치 볼 필요 없이 오직 시민의 통제를 받는다. 미국은 연방, 주, 지방 등 각급 단위의 검찰이 비교적 독립적으로 움직이며 서로 견제한다. 이 견제와 균형의 미국 사법체계 기본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트럼프는 집권 기간 내내 검찰 장악 시도를 하다가 처참하게 실패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갈랑드 법무부 장관은 그간 트럼프와 한국의 일부 관행과 달리 자의적으로 검찰에 개입하지 않는다. 바이든 대통령이 지나가다가 실수로 기자에게 트럼프에 대한 정치적 발언을 했다가 난리가 난 곳이 지금의 미국이다. 더구나 갈랑드 법무부 장관과 브래그 맨해튼 지검장은 언론에 부각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도대체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미국 출장에서 뭘 배워 오셨는지 무척 궁금하다.

아마 야당 관계자들은 “역시 안병진은 우리 편이야”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아니, 나는 민주공화국 편이다. 만약 당신들이 자의적으로 악용될 검찰 개혁 대신에 시민이 견제하는 사법체계 구축에 더 힘썼다면 지금의 검찰 국가 지형은 또 달라질 수 있었다. 이번에 누가 트럼프 기소를 결정했는가? 정치 검찰인가? 아니 시민들의 대배심이다. 이 제도가 완벽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검찰이나 경찰에게 모든 칼자루를 쥐여 주는 것보다는 낫다. 더구나 한국은 그간 검찰이 악의적으로 기소해서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나서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여야는 이를 견제할 시민 감찰 장치에 대해 관심도 없다.

지금 한국에서는 반도체의 미래 등을 둘러싸고 온갖 혁신론이 난무한다. 물론 이 논의는 필요하다. 하지만 이 모든 혁신은 기본을 단단하게 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새로운 리더는 기본을 스스로 가장 단단하게 지키면서 미래로 가자고 호소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는 그저 규범적인 주장이 아니라 시민의 신뢰를 얻어 선거에서 계속 이기는 가장 실용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많은 한계를 가진 바이든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3번 연속해서 선거에서 이긴 비결이기도 하다.

아마 하반기에 정치권들은 또 새 비대위를 만들 태세이다. 하지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비록 힘들고 때로는 위험하지만 용기 있게 기본을 다시 돌아보는 태도이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