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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특수영상 제작의 선구 이형표|임 영<영화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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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10면

독립기념관 원형 극장 안에 들어가면 주변 전체가 스크린으로 되어 있는 서클비전『내 사랑 금수강산』이라는 특수 영상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미국 디즈니랜드에서 계속 상영되고 있는『아메리칸 자니』와 맞먹는 것으로 앞으로 2년 이상 계속 상영될 것이다. 이형표 감독이 한국에선 처음으로 개발, 제작한 특수 영상 영화다.
설악산의 아름다운 계곡을 찍을 때엔 카메라 9대를 원탁형으로 배치, 부착하고 그것을 헬리콥터에 매달아 다니며 촬영했다. 카메라 1대가 40도씩 찍으면 카메라 9대가 3백60도 주변 전체를 찍는 것이 된다. 그 무게는 반t이 훨씬 넘는 6백50kg이나 되었다. 20분 짜 리지만 제작에 꼭 3년 걸려 8본 트랙 입체음향으로 완성했다.
이형표 감독은 이밖에도 역시 독립기념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3면 멀티영상『광복의 환희』라는 것도 제작했다. 지금은 93년 대전 엑스포에서 상영할 특수 영상 영화의 제작 준비 를 하고 있다.
그는 극영화 90여 편을 연출한 상업감독으로 알려져 있지만 걸어온 길은 조금 특수하다. 그는 서울대 사범대 영문과 출신으로 일제하 학생 때엔 조선미술전람회, 즉 선전 서양화부문에 입선한 적이 있다. 후에 홍익대 미술 대에서 강의를 한 적도 있다.
영화는 미국 공보 원·국제연합 한국 재건단(UNKRA), 미국 CBS-TV·NBC-TV, 문공부 국립 영화 제작소 등에서 뉴스·기록영화 촬영·현상 등 주로 기술분야에 중점을 두고 솜씨를 익혔다.
그러니까 조감독 경력 없이 감독이 된 사람이다. UNKRA의 녹음기사로 와 있던 테드 코넌트 와는 50년대 초『위기에 처한 아이들』(Children in Crisis),『한국의 미술가』(Korean Artist)등 기록영화를 함께 만들어 에딘버러 영화제·마닐라영화제에 출품, 수상했다.
코넌트는 그의 아버지가 하버드 대학 총장 때 객원교수로 와 있던 기록영화 제작자 로버트 훌라허티(Nanook of The North·1922년)의 영향을 받아 영화를 시작한 사람이다. 그는 미주리대학 미술교수로 한국의 그림을 보러 왔던 엘런 세이티 라는 연상의 여인과 서울시장 주례로 시청에서 결혼했다. 이형표는 들러리를 섰다.
코넌트는 50년대 초 전쟁의 상처뿐 아무 것도 없을 때 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가져와 여러 사람에게 계몽적 역할을 했다고 이형표는 생각한다. 사실 필자 같은 사람도 그때까지는 구경해 본적이 없었던 노란색 표지의 프랑스 영화잡지『카이에 듀 시네마』묵은 것 몇 권을 그에게서 얻어 대견스럽게 생각했었다.
신상옥은 그의 두 번째 영화『코리아』(54년)를 찍었는데 그때 마침 김학성과 살던 최은희와 살게 되어 영화계에서 인심을 잃고 따돌림당해 현상을 못하고 있었다. 문공부에 있던 이형표가 오라고 해서 현상해 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이 친해져 이형표가『젊은 그들』(신상옥 감독·55년), 『무영탑』(신상옥 감독·57년)등을 각색해 주었고 또 자신도 극 영화감독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형표의 영화는 반 이상이 빌리 와일더풍의 하이 코미디를 겨냥해 만들었던 것이지만 그것이 성공했다고는 그자신 생각하지 않는다. 코미디라고 해서 코미디언을 썼던 것은 아니고 모두 정식배우를 써서 코미디 효과를 내보려던 시도 자체에 무리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황금기의 한국 영화는 흥행 실패라는 것이 없어서 극장에 걸었다 하면 10만 이상은 들었다.
김지미가 아시아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탔던『너의 이름은 여자』(69년)는 외설영화라 하여 검찰에 잡혀갔었다.『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한국식으로 뒤집었던 것이다.『밤은 무서워』(68년)에서는 윤정희가 벗었는데 이른바 섹스영화의 효시쯤이 되지 않을까. 『말띠 여대생』(63년)은 코미디 풍의 청춘 물이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무겁고 심각한 주체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93년 대전 엑스포에서는 한국의 대기업들이 각자의 건물을 짓고 있는데 거기에서 상영할 홍보용 특수 영상 영화의 태반을 외국에 발주하고 있는 것이 아깝다고 이형표는 생각한다. 그것을 소 화할 수 있는 기술이 보편화되어 있다면 그 막대한 금액은 모두 한국 영화계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감독으로서 제작기술의 선구가 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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