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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1902년 첫 공식 이민부터 123개국 732만 명…사는 땅·국적 달라도 한민족

중앙일보

입력

빈곤·사회불안 피해 나라 떠나도 '한국인' 재외동포 발자취에 어린 아픈 근현대사  

외교부의 집계에 따르면 전 세계 재외동포 수는 약 732만 명(2021년 기준)에 이릅니다. 대한민국(약 5156만)과 북한(약 2616만)의 인구가 7772만 명임을 고려하면 약 10%에 달하는 한국인이 해외에 살고 있죠. 놀라운 사실은 이들 대부분이 약 160여 년 동안 세계 각지에 자리 잡았다는 겁니다. 수백만 명의 한국인은 어떤 과정을 거쳐 전 세계에 살게 된 걸까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한국이민사박물관을 찾아 알아봤어요.

박규리·조유나·유정현(왼쪽부터) 학생기자가 한국이민사박물관을 찾아 재외동포의 역사에 대해 알아봤다.

박규리·조유나·유정현(왼쪽부터) 학생기자가 한국이민사박물관을 찾아 재외동포의 역사에 대해 알아봤다.

국회는 지난 2월 27일 본회의를 열어 재외동포청 신설 등을 담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어요. 이에 따라 이르면 6월 초에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청이 공식 출범하게 됩니다. 전 세계 한인 단체들이 그동안 재외동포 정책 수립과 권익 신장을 위한 정부 전담 기구가 필요하다고 줄기차게 건의한 결과죠. 재외동포라 불리는 이들은 언제부터 해외에서 생활하게 된 걸까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인천광역시 중구에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을 찾아 재외동포에 대해 알아봤어요. 2008년 개관한 한국이민사박물관은 미국·멕시코·러시아·중국·일본·독일 등 전 세계에 자리 잡은 한국 이민자들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에요.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이 소중 학생기자단을 맞이했죠.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정부의 허락을 받은 첫 공식 이민인 1902년 하와이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됐으며, 세계로 나간 재외동포들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정부의 허락을 받은 첫 공식 이민인 1902년 하와이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됐으며, 세계로 나간 재외동포들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재외동포재단법」에 따르면 재외동포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외국에 장기체류하거나 외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 국적과 관계없이 한민족(韓民族)의 혈통을 지닌 사람으로서 외국에서 거주·생활하는 사람을 말해요. 규리 학생기자가 "이민을 한 나라의 시민권을 갖는 등 아예 국적을 바꾼 이민 1세대, 재외한인 2~3세도 재외동포에 포함되나요?"라고 질문했죠. "재외동포는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한 해외이주민, 체류자를 가리키는 재외국민, 우리 국적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한민족의 일원을 가리키는 외국국적동포로 나뉘어요. 재외국민보다 외국국적동포가 2배 가까이 많습니다. 따라서 외국의 시민권이나 국적을 가진 분들도 재외동포에 포함돼요."

한국이민사박물관서 살피는 한인 이민의 역사  

우리 민족의 이민 역사는 구한말인 180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에는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두고 힘겨루기를 하는 등 정세가 불안했으며, 계속되는 가뭄으로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어요. 농민·노동자들은 기근과 빈곤, 불안한 사회·정치 상황을 피해 중국(만주)·러시아(연해주)·미국(하와이)·멕시코 등으로 이주해 삶의 터전을 마련했죠.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이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재외동포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게 된 과정과 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말했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이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재외동포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게 된 과정과 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말했다.

먼저 중국·러시아 재외동포의 역사부터 살펴볼까요. 1800년대 말 청나라가 만주 지역의 봉금령을 해제하고 이주 및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면서, 조선인들은 땅이 비옥한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이주를 본격화 했어요. 1910년 조선이 일제에 국권을 강제로 빼앗긴 후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만주·연해주로 이주해 일제의 감시와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민족성을 지키고 독립운동에 참여했죠. 1899~1905년 만주 북간도에 형성된 한인마을 명동촌이 대표적입니다. 저항시인 윤동주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에는 명동학교가 세워져 민족교육과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됐죠.

당시 만주에 살던 동포들은 독립군에게 식량·자금을 제공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지원했어요. 1920년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독립군 연합부대인 홍범도·최진동·안무 등이 이끈 대한북로독군부가 두만강을 불법으로 건너 독립군을 추격한 일본군 대대를 무찌른 봉오동 전투, 같은 해 만주 허룽현 청산리 백운평·천수평·완루구 등지에서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10여 차례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청산리 독립전쟁에 대해 들어본 적 있을 텐데요. 한국 독립군의 승리 뒤에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은 우리 동포들의 조력이 있었어요.

간도로 쫓겨가는 이민들. 일제는 만주 황무지 개간을 위해 조선인을 집단으로 이주시켰다. 국가기록원

간도로 쫓겨가는 이민들. 일제는 만주 황무지 개간을 위해 조선인을 집단으로 이주시켰다. 국가기록원

일본은 만주를 중국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기 위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을 세웁니다. 만주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조선인을 집단으로 이주시킨 결과 1930년에는 60만 명 정도였던 인구가 1940년에는 145만 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어요. 일본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며 해방을 맞아 민주주의 공화국이 세워진 대한민국과 달리 중국에는 1949년 공산주의 체제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죠. "중국에 살던 재외동포들은 수십 년간 우리와 소통이 단절됐었어요. 1992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교하면서 하얼빈·연길 등 중국 동북지역의 재외동포, 즉 조선족이 한국에 많이 들어와 살게 됐죠."

러시아 이민의 역사도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됐어요. 1860년 청나라와 국경조약을 맺으며 러시아는 우수리 강의 동쪽 지방인 연해주를 영토로 삼게 됐죠. 1800년대 후반 조선에서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피해 조선인은 연해주를 중심으로 이민을 시작했어요.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연해주 지역에는 독립운동가·지식인 등이 모이며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광복군 정부가 조직되는 등 독립운동의 전진기지가 됐죠. 하지만 1937년 소련 스탈린 정권의 강제이주정책으로 17만여 명의 한인들은 살던 곳에서 쫓겨나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떠나야 했죠. 당시 상황은 너무나도 참혹해서 열차를 타고 6000km를 이동하는 한 달여 동안 아이·노인 등 1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해요.

1923년 연해주에서 발행하기 시작한 한인신문 '선봉'. 1919년 3·1운동에 자극받은 연해주 동포들이 '3.1 신문'에 이어 발간한 신문이다. 한국이민사박물관

1923년 연해주에서 발행하기 시작한 한인신문 '선봉'. 1919년 3·1운동에 자극받은 연해주 동포들이 '3.1 신문'에 이어 발간한 신문이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후에도 한인들은 근면성을 발휘해 살아남았어요. 한글로 된 시와 소설이 실린 신문을 발행하고, 극장을 설립해 지친 동포들의 외로움을 더는 등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도 힘썼죠. 이들이 바로 고려인이라 불리는 재러시아·재CIS(구소련 연방의 일원이었던 독립국들) 동포입니다."

하와이 이민, 정부가 허락한 첫 공식 이민

1800년대 만주·연해주로의 이주는 빈곤과 불안정한 사회를 벗어나려는 개인의 의지로 시작된 비공식적인 이민이에요. 정부의 허락을 받은 첫 공식 이민은 미국 하와이 이민이죠. 미국은 재외동포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나라이기도 해요. 2021년 기준 미국에 사는 재외동포는 263만3777명으로, 전체 재외동포 중 35.96%를 차지하죠. 정현 학생기자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 본토가 아니라 하와이에 이민을 많이 간 이유는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어요.

미국 하와이로 이민 간 한인들을 실어나른 갤릭호 모형. 한국이민사박물관

미국 하와이로 이민 간 한인들을 실어나른 갤릭호 모형. 한국이민사박물관

"1800년대 중엽부터 하와이에 사탕수수 농장이 본격적으로 조성되며 세계 각국에서 노동자를 모집했죠. 중국인·일본인은 이미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한국에서는 미국인 데쉴러가 설립한 동서개발회사의 주도로 하와이 이민이 시작됐죠." 한국이민사박물관에는 당시 동서개발회사가 개항장이었던 제물포를 비롯한 대한제국 내 도시 기차역·시장 등에 붙인 모집 공고가 전시돼 있었어요.

"공고를 보면 '하와이의 기후는 심한 더위와 추위가 없어 온화하고, 모든 섬에 다 학교가 있어 영어를 가르치면서도 학비를 받지 않는다'라고 적혀있죠. 하지만 친척과 헤어지고 조상의 분묘를 버릴 수 없었던 한국인들의 호응이 많진 않았어요. 데쉴러는 제물포웨슬리메모리얼교회(현재 인천내리감리교회)의 존스 목사에게 신자들의 설득을 부탁해 상당수가 하와이 이민을 결심했죠."

박규리(맨 왼쪽부터)·유정현·조유나 학생기자가 하와이에 세워진 한인학교를 재현한 전시실에서 하와이 재외동포들의 생활에 대해 알아봤다.

박규리(맨 왼쪽부터)·유정현·조유나 학생기자가 하와이에 세워진 한인학교를 재현한 전시실에서 하와이 재외동포들의 생활에 대해 알아봤다.

첫 하와이 이민 경로는 인천 제물포항→일본 나가사키항→하와이 호놀룰루항이었어요. 1902년 12월 22일 월요일 하와이 첫 이민단 121명이 인천 제물포에서 일본우선회사 현해환에 승선해 2일 후 나가사키에 도착했고, 검역소에서 신체검사·예방접종을 마친 뒤 미국의 태평양 횡단 기선 갤릭호에 타고 항해해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죠. 전장 128.1m, 전고 9.0m, 전폭 12.9m 크기의 이 배는 총 6회에 걸쳐 이민자들을 수송했어요. 호놀룰루에 입항 후 검역과 입국 절차를 마친 이들은 오아후 섬 와이알루아 농장 모쿨레이아에서 본격적인 이민 생활을 시작했죠.

농장 일과는 고됐어요.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해 오전 6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일해야 했으며 점심시간은 30분만 주어졌죠. 한 달 일을 마치면 현금으로 월급을 받았는데 1905년 기준 성인 남자는 한 달에 17달러 정도, 여자나 소년은 하루에 50센트 정도를 받았다고 해요. 소중 학생기자단은 갤릭호 축소 모형과 하와이에 도착한 노동자들이 살던 집 모형을 유심히 살펴봤죠. 김 관장이 "결혼한 부부는 작은 정원이 있는 통나무집에서, 독신 남자들은 긴 기숙사식 건물에서 3~4명씩 살았는데, 하와이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으니 마당에 배추·무·콩을 심어 김치를 담그고 된장·고추장·간장을 만들어 한국 음식을 해 먹었어요"라고 설명했어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이 목에 걸고 다닌 방고(신분증). 한국이민사박물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이 목에 걸고 다닌 방고(신분증). 한국이민사박물관

하와이 한인 사탕수수 노동자 중에는 혼기를 훌쩍 넘긴 남성들이 많았어요. 당시 이민자 중 남성의 수가 여성보다 10배나 더 많았기 때문이죠. 이에 1910~1924년 수백 명의 한국 여성이 사진을 통해 하와이 남성 이민자들과 선을 본 뒤 결혼하기 위해 하와이로 건너갔어요. 이들을 '사진신부(Picture brides)'라고 불러요. 사진신부들이 하와이에 오면서 가정을 이루게 된 한인들을 기반으로 하와이 한인사회가 형성됐죠.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는 독립운동을 하기 매우 어려웠어요. 그래서 많은 분이 외국에 나가서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을 했죠. 박용만과 이승만 전 대통령처럼 독립운동 목적으로 하와이에 온 한인들도 있어요. 이들은 독립을 위해 군대를 조직하고 독립자금을 모금하였으며,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교육도 했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회에서 발행한 『KOREA MUST BE FREE』. 한국이민사박물관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회에서 발행한 『KOREA MUST BE FREE』. 한국이민사박물관

불법으로 얼룩진 멕시코 첫 한인 이민

1905년에는 1033명의 한인이 이민 중개인을 통해 4년간의 계약노동을 전제로 새로운 삶을 찾아 인천 제물포를 출발해 멕시코로 향합니다. 이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 지속해서 이뤄진 하와이 이민과는 달리, 사실 이민 중개인에 의해 단 한 차례로 끝난 대규모의 불법 노동 이민이었어요. 영국 상선 일포드호를 타고 멕시코 남부 살리나크루즈 항구에 도착한 한인들을 맞이한 건 불볕더위와 난생처음 보는 에네켄밭이었죠. 에네켄은 선인장과에 속하는 용설란의 일종으로, 잎의 길이는 2m 이상, 너비는 30~40cm로 한 나무에 50~100개 정도의 잎이 뭉쳐있어요. 에네켄 잎을 잘라 으깨면 흰 실타래가 되는데 이것을 묶어 선박용 로프나 마대용 자루를 만들죠. 당시 농장에서 사용하던 커다란 낫·칼·가위 등을 보며 소중 학생기자단은 에네켄의 거대함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멕시코에 있는 30여 개의 에네켄 농장으로 흩어져 4년간 노동해야 했던 한인 이민자들은 하루에 약 240개 정도의 잎을 따야 했죠. 에네켄의 잎 꼭대기와 양옆에는 날카롭고 단단한 가시들이 무수히 솟아있어 찔리고 긁혀 하루도 피가 멈출 날이 없었어요. 할당량을 못 채우면 채찍으로 맞기도 했고,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죠." 게다가 언어도 통하지 않고 이질적인 문화는 정착 생활을 더욱 고되게 만들었어요.

김상열 관장(맨 왼쪽)이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한인 이민자들이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김상열 관장(맨 왼쪽)이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한인 이민자들이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어려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의 한인들 역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모았어요. 계약 만기 3일을 앞둔 1909년 5월 9일 미주 대표 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메리다 지방회가 창립됐죠. 이후 멕시코의 동포들이 거주하는 각 지역에 지방회를 설립해 서로 도우며 독립운동도 후원했어요. "당시 멕시코 한인들은 많은 돈을 벌진 못했지만 밥을 할 때 쌀을 한 숟갈씩 덜어 모아 독립자금으로 썼죠." 1910년에는 메리다 지방에서 사관양성 기관 숭무학교가 창설돼 생도 118명을 배출했어요. 당시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는 1917년 10월부터 멕시코 전역을 순방하면서 한인들을 위로하고, 독립운동을 고무시켰죠.

"안창호 선생은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던) 동포들이 노예와 같은 삶을 살고 있을 때 그분들의 상황을 조국에 알리기도 하고, 동포들의 권익을 꾀하기 위해 한인단체를 통합해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고 독립자금 모금 및 다양한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을 펼쳤습니다."

역사의 비극이 낳은 이주, 재일한인과 전쟁고아  

2021년 기준 미국(263만3777명)과 중국(235만422명)에 이어 가장 많은 한인들이 사는 나라는 일본(81만8865명)입니다. 한인의 일본 이주와 정착 유형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 전후로 나뉘어요. 한일강제병합 전에는 외국인노동자라는 신분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임무나 학업을 마치기 위해 일시체류한 유학생·외교관 등이 많았죠. 하지만 한일강제병합 이후 조선인은 일본의 외국인노동자 입국제한에 해당하지 않게 됐어요. 일본인 사업가들은 자국의 노동력 부족을 해소할 저임금 노동자를 데려오기 위해 브로커를 파견해 조선인 노동자 모집에 본격적으로 나섰죠. 그 결과 재일조선인의 수는 1915년 3917명에서 1920년 3만189명으로 5년 만에 8배가량 증가했어요.

재일한인들의 민족교육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재일한인 유아 교육교재 『어깨동무』. 한국이민사박물관

재일한인들의 민족교육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재일한인 유아 교육교재 『어깨동무』. 한국이민사박물관

유나 학생기자가 "본인의 의사가 반영된 자발적 이민 외에 강제로 이민한 사례도 있나요?"라고 질문하자, 김 관장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정책에 의한 이민 사례를 소개했어요.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통해 해당 토지와 연고관계를 신고한 사람에게 소유권을 인정하는 정책을 펼쳤고, 신고하지 않은 토지는 국가 소유로 한 뒤 일본인 지주 및 토지회사에 넘겼어요.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던 당시 대부분의 조선 농민은 문맹이었고, 근대법을 몰랐기 때문에 많은 수가 경작하던 토지를 빼앗겼죠.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일을 찾아 일본으로 떠났어요."

일본 오사카로 쫓겨가는 노동자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는 조선인 노동자 모집에 적극 나섰다. 국가기록원

일본 오사카로 쫓겨가는 노동자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는 조선인 노동자 모집에 적극 나섰다. 국가기록원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에는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연합국과 대치했습니다.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을 만들기 위해 1939년 '조선인 노동자 모집 및 도항 취급 요강'을 발표해 1945년까지 조선인들을 일본·남사할린·남양군도 등으로 연행해 탄광·광산·철강·토목 산업 등에서 노역시켰죠. 이것을 강제징용이라 합니다. 군인이 모자라자 어린 학생까지 학도지원병이란 명목으로 강제징집하고, 여성자원봉사대라는 명목으로 20만 명의 여성을 동원했죠. 이들 중 8만명가량이 소위 '종군위안부'로 끌려갔어요. 2023년 오늘날까지 한일관계 쟁점인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이 이 시기에 불거진 비극입니다.

사할린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사용했던 국수틀. 동포들은 여러 가족·친지가 모이거나 동네에 잔치가 있을 때마다 국수틀을 이용해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사할린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사용했던 국수틀. 동포들은 여러 가족·친지가 모이거나 동네에 잔치가 있을 때마다 국수틀을 이용해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1945년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이한 뒤에도 재일한인 중 많은 분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어요. 일본 정부가 귀국하려는 이들이 일본에서 모은 돈을 다 가져가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가져갈 수 있는 짐의 양도 제한했거든요. 일본에 남은 한인들은 재일동포 사회를 형성했죠. 남북이 분단되기 전 일본으로 간 경우에 속하는 이들은 조선 국적이라 일본 내에서 많은 차별을 받았죠"

전쟁터로 끌려가는 여인들. 일제는 여성자원봉사대라는 명목으로 20만여 명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국가기록원

전쟁터로 끌려가는 여인들. 일제는 여성자원봉사대라는 명목으로 20만여 명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국가기록원

광복 후에도 역사적 비극에 의해 대규모 이민이 행해진 시기가 있어요.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이 계기였습니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10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부모를 잃고 전쟁고아가 됐죠. 이들은 외국의 원조와 민간단체의 인도주의적 지원에 의존해 미국·유럽 등 14개국에 입양됐어요. 또 미군과 결혼한 여성들이 귀국하는 미군과 함께 이민한 경우도 있죠.

한국 근대화의 역군 파독 광부·간호사  

한국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대한민국은 공장을 짓고 도로를 만들려고 해도 돈이 없었고 실업난은 심각했습니다. 정부는 실업률 해소와 외화 획득을 위해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한국인들을 독일로 보냈어요. 1963년 정부와 서독탄광협회의 협정 체결을 계기로 한국 광부들의 독일 진출이 시작됐죠. 또 1965년 의사였던 이수길·이종수씨가 한국 간호사를 독일 병원에 취업시킨 것을 계기로, 1969년 한국의 해외개발공사와 독일병원협회의 간호인력 고용에 대한 정식 협약이 체결되면서 정부 주도로 간호사들이 독일로 향했죠. 1970년대 말까지 파독 광부는 약 8000여 명, 파독 간호사는 약 1만여 명에 달했습니다.

파독 광부가 독일 광산에서 근무시 착용했던 작업모와 장비들. 한국이민사박물관

파독 광부가 독일 광산에서 근무시 착용했던 작업모와 장비들. 한국이민사박물관

1971~1972년에는 세 차례에 걸쳐 조선기술자 약 300여 명이 함부르크시에 있는 호발트 조선서로 진출하기도 했어요. 3년 노동계약으로 떠난 이들은 계약 만료 후 대부분 귀국해 한국 조선산업 발전에 기여했죠. "광부·간호사·조선기술자 등 재독한인 노동자들이 낯선 환경에서 힘들게 번 월급은 대부분 달러로 환전돼 한국의 가족·친지들에게 송금됐어요." 1960~70년대 파독 광부·간호사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연간 약 5000만 달러로, 한국 경제개발에 기여했죠. 한때 민총생산(GNP)의 2%에 달하기도 했어요.

독일 사회에 들어간 한인들은 근면함과 성실함을 인정받았어요. 파독 간호사의 경우 고된 근무 속에서도 친절함과 성실함을 잃지 않아 독일 사람들로부터 동양에서 온 연꽃이라는 뜻의 '로투스 블루메(Lotus Blume)'로 불리기도 했죠. 하지만 독일정부가 1973년 외국인 인력 모집 정책을 중지하면서 외국인 노동자인 이들은 독일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체류권 투쟁을 시작했어요. 독일 이민의 역사 전시관에는 한쪽 팔이 잘린 간호복이 있었는데요. 독일 내 외국인 노동자 추방 운동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자른 것이죠. 재독한인 중 일부는 고국으로 돌아오기도 했어요. 귀향한 파독 광부·간호사들이 정착하도록 조성된 경남 남해독일마을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독일정부의 외국인 인력 모집 정책 중지에 반발해 한쪽 팔을 자른 파독 간호사의 간호복을 살펴봤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독일정부의 외국인 인력 모집 정책 중지에 반발해 한쪽 팔을 자른 파독 간호사의 간호복을 살펴봤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전시를 통해 살펴본 한인들의 이민 과정은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과 맞물려 있죠. "재외동포들은 광복 후에도 모국에 보탬이 되기 위해 노력했어요. 예를 들어 재일동포들은 주일 한국공관 10곳 중 9곳을 지어 기증했고, 1960년대 수출입국으로의 성장 토대가 된 구로공단 건설에도 기여했죠." 이처럼 재외동포는 사는 땅은 달라도 한민족이라는 동질감을 갖고 대한민국 현재의 모습을 만드는 데 기여한 우리 사회의 일원이에요. 우리가 한인 이민의 역사를 알고 이들의 삶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를 위해 정부의 허락하에 1902년 시작된 하와이 이민 100주년을 맞아 첫 공식 이민의 출발지였던 인천에 한국 최초의 이민사박물관이 설립되기도 했죠. 중국·러시아·일본·미국·멕시코·독일 외에도 우리 동포들은 오대양 육대주 193개국에서 살고 있어요. 소중 독자 여러분도 이들의 발자취를 찾아보세요. 세상을 보는 시야도 넓어진답니다.

연표로 본 재외동포의 역사

만주·연해주·중앙아시아·일본·미국·멕시코·독일 등으로 떠난 동포들의 이민 역사를 연표로 살펴봅시다. 일본의 한일강제병합과 1945년 맞이한 광복을 기점으로 이민 역사의 흐름도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19C 중반

조선농민들, 러시아·만주로 생계형 이주

1890

서재필 한인 첫 미국 시민권 획득

1903

첫 한인 이민선 미국 하와이 도착

 

안창호,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북미 최초의 한인단체인 한인친목회 조직

1905

멕시코 계약노동자 첫 이주

1910

일본, 한일강제병합 

 

최초의 사진신부 하와이 도착

1913

안창호,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 흥사단 창립

1923

관동대지진 발생. 일본, 유언비어 조장해 재일 조선인 학살

1924

미국, 동양인 이민금지법 통과로 하와이 사진신부 이주 종식

1934

스탈린 대숙청으로 고려인 2000~3000명 행방불명

1937

연해주 한인들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1938

일본, 한인의 만주 이주 장려

1940

조선인 노동자 활용에 관한 방책 공표(조선인 징용령)

1945

8월 15일 일본제국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우리나라 광복. 

1952

중화인민공화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 건립

1963

247명의 광부, 3년 계약으로 독일 광산 취업

1965

한국 간호사 독일 병원 초청으로 취업

1967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동포 9000명 한국국적 획득

1978

독일정부 외국인근로자 신규고용 전면금지 발표, 15년간의   독일 인력진출 막내림

2003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식(하와이)

2007

제 1회 세계한인의 날(10.5일)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평소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심이 많아요. 이번 한국이민사박물관 취재를 통해 평소에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재외동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알게 되어 기뻤죠. 박물관은 우리 동포들이 왜, 어떻게 다른 나라로 이민하였는지를 전시해요. 특히 이민자들이 국내 사회적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해외로 이주했지만, 자신들이 한국인임을 잊지 않고 독립운동을 끊임없이 도운 부분이 감동적이었죠. 또 하와이 이민자들에 대한 이야기 중 '사진신부' 관련 내용이 아주 흥미로웠는데, 이민자들이 해외로 이주하여 정착해 안정된 삶을 살아도 혼자 사는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나온 아이디어가 아닐까 해요. 재외동포와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박규리(서울 위례별초 5) 학생기자

저는 역사에 관심이 많지만 이민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어요. 이번 취재를 통해 한국 이민의 역사에 대해 잘 알게 되어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이민의 역사는 생각보다 참 기구했는데, 그중에서도 멕시코 에네켄 농장 이야기와 한국전쟁 시절 강제로 외국에 보내진 전쟁고아들의 이야기가 가장 슬펐어요. 또 하와이 '사진신부' 이야기는 기발하다고 생각했고, 하와이 이주 한인들이 독립운동 기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가슴이 웅장해지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정말 뜻깊은 경험이었고, 이민사가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우리나라 역사 중 한 부분이라는 점을 깨닫고 모두 이민사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유정현(서울 목동초 5) 학생기자

느낀 것도 많고 배운 것도 많은 취재였어요. 우리나라가 살기 어려워서 정부가 허락한 첫 공식 이민이었던 하와이 이민이 속상한 마음에 가장 기억에 남아요.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하와이 '사진신부'입니다. 현재의 인연을 맺어 주는 앱과 같은 것인데 당시 하와이에 간 사람 중 결혼하지 않은 총각들이 많아서 생긴 일이래요. 이민을 온 총각이 사진과 자기소개서를 우리나라로 보내면 그를 마음에 들어 한 처녀들이 자기소개서와 사진을 다시 보내주는 방식이었대요. 그럼 그 총각은 그들 중 한 명을 골라 결혼하는 것이죠. 이번 취재로 인해 우리나라의 또 하나의 아픈 역사를 발견한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어요.

조유나(서울 사대부초 5)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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