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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와 사색] 늦게 온 소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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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2호 34면

늦게 온 소포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니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을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늦게 온 소포』 (민음사 2000)

그리 크지 않은 물건을 포장해 우편으로 주고받는 것. 소포(小包)라 합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물건을 택배로 받을 때와는 느낌과 정서가 다릅니다. 이 소포의 겉면에는 으레 반가운 이름과 그리운 주소가 적혀 있는 까닭입니다. 세련과는 거리가 먼, 무슨 금은보화라도 담겨 있는 듯 꽁꽁 얽힌 포장을 힘겹게 열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일순간 아득해집니다. 이 세상의 교환가치를 훌쩍 뛰어넘는 물건이 얼굴을 내밀기 때문입니다. 봄의 마늘이든 여름 감자든 가을 배추든 혹은 겨울 유자든. 그리고 큰 마음이 적힌 짧은 편지 한 장도.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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