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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와 사색] 혼자 가는 먼 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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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호 34면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사람의 마음은 밭 같습니다. 넓은 두둑과 깊은 고랑이 있는. 어느 한쪽을 기쁨이라 한다면 다른 한쪽은 자연히 슬픔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살다보면 종종 타인의 마음-밭에 들어가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내가 디뎌야 할 곳과 밟아서는 안 될 곳을 유심히 살펴야 합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은 듯해도 그 속에 무엇이 심어져 있는지 모르니까요.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발자국을 남기거나 한 자리에 멈춰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나아가야 합니다. 어쩌면 타인은 내가 혼자 가야 할 가장 먼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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