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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와 사색] 어두워지는 순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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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호 30면

어두워지는 순간
문태준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어두워지려는 때에는 개도 있고, 멧새도 있고, 아카시아 흰 꽃도 있고, 호미도 있고, 마당에 서 있는 나도 있고…… 그 모든 게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늑대처럼 오래 울고, 멧새는 여울처럼 울고, 아카시아 흰 꽃은 쌀밥덩어리처럼 매달려 있고, 호미는 밭에서 돌아와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마당에 선 나는 죽은 갈치처럼 어디에라도 영원히 눕고 싶고…… 그 모든게 달리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다른 개의 배에서 머무르다 태어나서 성장하다 지금은 새끼를 밴 개이고, 멧새는 좁쌀처럼 울다가 조약 돌처럼 울다가 지금은 여울처럼 우는 멧새이고, 아카시아 흰 꽃은 여러 날 찬밥을 푹 쪄서 흰 천에 쏟아놓은 아카시아 흰 꽃이고…… 그 모든 게 이력이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베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이상하지, 오늘은 어머니가 이것들을 다 버무려서
서당골에서 내려오면서 개도 멧새도 아카시아 흰 꽃도 호미도 마당에 선 나도 한사발에 넣고 다 버무려서, 그 모든 시간들도 한꺼번에 다 버무려서
어머니가 옆구리에 산미나리를 쪄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이 다 어두워졌네
『맨발』 (창비 2004)

 경계는 흐릿하지만 그 구별만큼은 명확한 것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오후와 저녁이 또 새벽과 아침이 그렇습니다. 늦겨울과 초봄, 만개와 낙화의 장면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움과 반가움, 환희와 아쉬움, 약속과 실망 같은 것들은 얼마나 다르면서도 일순간 같아지는 것인가요. 속절없는 마음 앞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지켜보는 것입니다. 하나로 고정되어 있던 초점을 거두고 두루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여전히 지녀야 하는 것과 새로 챙겨야 하는 것과 이제는 그만 놓아버려야 하는 것을 분별해가며. 마치 새로 가방을 꾸리듯.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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