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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시시각각

대통령 참모는 한 수 더 봐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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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경제에디터

김동호 경제에디터

한국전력은 지난해 33조원에 달하는 적자를 냈다. 적자 행진은 올해도 계속된다. 원가보다 턱없이 싼 전기요금을 받고 있어서다. 결국 적자가 쌓일 수밖에 없고, 한전의 회사채 누적 발행액은 지난해 70조원을 훌쩍 넘겨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여기엔 나라 안팎의 배경이 있다. 안으로는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을 강행하면서 전기요금 인상을 미룬 후폭풍이 크다. 밖으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한 여파다. 두 요인 모두 원전의 중요성과 뗄 수 없는 일들이다. 윤석열 정부는 이 충격파에 맞서 지난해 여름부터 전기요금 현실화를 예고했다. 지난해 10월 전기·가스 요금 인상을 단행했다. 올해 1분기에는 전기요금을 또 올렸다. 일은 잘 돌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던 대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난방비 대란, 은행 돈 잔치 대처
정교하지 않고 즉흥적 모습 역력
완벽할 순 없지만 균형감 있어야

호기롭게 시장 원리를 강조하면서 시작된 정부의 에너지 가격 현실화는 지난달 올해 1월 난방비 고지서가 날아들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민심이 요동치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5일 ‘제13차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열고 에너지 요금 인상 폭과 속도 조절을 주문했다. 이때부터 정책이 엉킬 수밖에 없어졌다. 윤 대통령의 인상 속도 조절 시그널과 달리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닷새 후 요금인상 불가피론을 폈다. 그는 “원가 이하의 요금구조에선 적자가 계속 누적되는데 그런 상황을 쌓아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에너지 시스템 정상화를 꾀하면서 취약계층 지원은 확대하는 투트랙 전략을 써서 에너지 위기를 정공법으로 넘어가겠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의 ‘속도 조절’과 담당 장관의 ‘정공법’은 뉘앙스가 충돌한다. 한전 적자 탈출의 험로를 예상하게 하는 상황이다. 이렇게 된 건 손 따라 두는 바둑처럼 정교함이 부족한 탓이 크다. 정부는 지난달 ‘난방비 폭탄’이 터지고 나서야 여론에 밀려 취약계층 지원을 확대하고 나섰다. 취약계층 117만 가구에 대해 에너지바우처 지원을 확대하고, 가스공사는 사회적 배려 대상자 160만 가구의 가스요금 할인 폭을 두 배로 올렸다. 하지만 한시적이다. 겨울은 해마다 돌아올 텐데 어떻게 대처할지 의문이다.

지금 복기하면 전기료 현실화에 나섰을 때부터 취약계층 지원책을 두텁게 준비했다면 어땠을까. 취약계층만 보호된다면 난방비 대란이 이번처럼 증폭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은행의 돈 잔치를 견제하는 과정에서도 정교한 모습이 안 보인다. 윤 대통령은 은행과 통신의 독과점을 질타했다. 시원해 보였지만 문제가 해결될지 의문이다. 은행들은 정부 압박에 떠밀려 최근 가산금리를 손질했지만 여전히 시늉뿐이다. 이렇게 되는 건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의 금융감독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탓일 수도 있다. 가산금리 책정에 문제가 있다면 은행에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관치를 하라는 게 아니고 가산금리가 정당하게 책정되는지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국내 은행은 오히려 소규모라서 문제가 많다. 외환위기 때 한국 금융의 결정적 결함은 투자은행(IB)이 없다는 점이었다. 대규모 주식공개(IPO)를 하면 미국계 IB에 거액의 수수료를 갖다 바쳐야 한다. 국내 은행은 IB를 중심으로 오히려 더 대형화해야 할 판이다. 서울은 금융허브 순위에서 홍콩은 물론 상하이·베이징에도 밀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폭주를 막은 것만으론 우리 경제가 처한 엄중한 현실을 헤쳐나가기 어렵다. 빈틈이 조금만 있어도 정책의 동력은 떨어진다. 주 52시간제 개편안이 나오자 반발이 쏟아지고, 한·일 관계 정상화엔 죽창가가 다시 고개를 드는 게 암울한 현실이다. K칩스법은 기획재정부의 오판으로 국회에서 다시 수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대통령실의 비서실장·경제수석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참모가 한 수 더 멀리 내다보는 조언을 해야 대통령이 더 균형 잡힌 대책을 내놓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