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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렬의 시시각각

반도체 전쟁엔 우방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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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렬 논설위원

이상렬 논설위원

“도대체 경제학 책에서 배우지 못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자본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공산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모르겠다.”

미국 초과이익공유제 꺼내 논란 #첨단 반도체칩 생산기지화 구상 #메모리 최강국 한국엔 중대 도전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은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 작심 비판한 일이 있다. 2011년 3월, 이명박(MB) 정부 시절이다. 국무총리를 지낸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제안한 초과이익공유제가 재계를 휘몰아쳤을 때다. 이 발언으로 삼성은 MB 정부와 한동안 불편한 관계를 겪었다. 초과이익공유제는 ‘초과이익’을 어떻게 산정하느냐부터 논란이었다. ‘계획경제 요소가 다분한 반(反)시장적 발상’이란 비판 속에 제도는 유야무야됐다.

반도체 보조금 지원 조건으로 초과이익공유제를 제시한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 연합뉴스

반도체 보조금 지원 조건으로 초과이익공유제를 제시한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 연합뉴스

 이 뜬금없는 제도를 미국이 들고 나왔다. 미국 정부로부터 1억5000만 달러(약 2000억원) 이상의 반도체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예상을 초과하는 이익 일부(보조금의 75%까지)를 미 정부와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 종주국을 자처하는 미국이 이렇게 나오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 납세자 돈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논리인데, 그렇다면 외국 기업과 주주 이익은 침해해도 되나. 어쩌면 우리는 미국이 시장경제 체제의 보루가 돼주길 바라는 헛된 기대에 빠져있는지 모른다.

 정권을 불문하고 미국 정책엔 ‘자국 우선주의’가 관통한다.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도 그랬다. 후발 주자인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세계시장을 휩쓰는 바람에 인텔 등 미국 업체들이 궁지에 내몰리자 레이건 정부가 완력 행사에 나선 것이다. 일본 반도체 회사의 생산원가 공개 등 독소조항이 많았다. 그중 압권은 미국 반도체 업체들의 일본시장 점유율을 10%에서 20%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상대 나라 시장에서 팔리는 자국 제품 점유율을 강제하는’, 시장경제와는 거리가 한참 먼 이 협정을 계기로 일본 반도체 업계는 추락했고, 미국 반도체는 다시 패권을 장악했다. 공교롭게도 일본의 몰락이 한국의 기회가 됐다. 일본의 저가 공급에 제동이 걸리면서 삼성의 메모리반도체 사업은 적자에서 벗어나 급성장 궤도에 올랐고, 과감한 투자와 기술 개발로 메모리 세계 1위로 일어설 수 있었다.

 베일을 벗고 있는 미국 반도체 정책엔 초과이익공유 말고도 한국 반도체 산업의 급소를 때릴 내용이 적지 않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미국을 최첨단 메모리반도체 생산기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미 상무부는 “미국의 반도체 공장은 2030년까지 최첨단 D램을 경쟁력 있는 수준으로 생산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1980년대 반도체 전쟁에서 일본을 패퇴시킨 후 30년간 미국은 반도체 제조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설계는 미국이, 생산은 한국(메모리)과 대만(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이 맡는 글로벌 분업 구도가 정착됐다. 메모리 시장엔 지금도 마이크론 등 미국 기업이 있다. 하지만 부동의 1위는 삼성이고, 기술도 삼성이 선도한다. 그다음이 SK하이닉스다. 미국은 이 구도를 더는 용인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미 상무부는 “수퍼컴퓨팅에 중요한 차세대 메모리 기술 개발이 미국에서 이뤄질 것”이라고 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바이든 정부 들어 ‘반도체 동맹’이라는 말이 한·미 양국에서 나왔다.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꺾고 있고,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수백억 달러를 들여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미국의 구상은 그게 다가 아닌 것이다. 미국은 첨단 반도체의 연구개발(R&D)·설계·생산이 모두 이뤄지는 유일 국가가 되길 원한다. 이렇게 되면 한국 반도체 성공신화의 토대가 된 국제 분업 판이 뒤흔들린다. 미국 업체가 생산하든, 삼성과 SK하이닉스가 미국에 공장을 짓든 최첨단 메모리반도체 생산기지라는 한국의 독보적 지위와 전략적 중요성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반도체 전문가인 양향자(무소속) 의원은 “미국이 생각보다 빨리 발톱을 드러냈다”고 평했다. 역시 반도체 패권 전쟁엔 우방이 없다. 그런데, 우리 전략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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