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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안 낳는 게 부성애" 요즘은 남편들이 '딩크족' 외친다 [출산율 0.78의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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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최근 비출산을 먼저 제안하는 2030세대 남편이 늘어나고 있다. 사진은 지난달 9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한 베이비페어 행사에서 2030세대 부부가 젖병소독기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 뉴스1

최근 비출산을 먼저 제안하는 2030세대 남편이 늘어나고 있다. 사진은 지난달 9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한 베이비페어 행사에서 2030세대 부부가 젖병소독기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 뉴스1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출산율 0.78의 나라 ②]

 직장인 서모(39)씨는 최근 아내에게 먼저 ‘딩크(DINK·무자녀 맞벌이)족’이 되길 제안했다.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부부에게 집중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아내의 동의를 받은 서씨는 부모에게도 ‘딩크’ 선언을 하면서 “다른 의견이 있다면 아내 말고 나에게만 말씀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간 ‘비(非)출산주의’는 남성보다 여성 사이에서 뚜렷한 현상으로 인식돼 왔기 때문에 혹여 부모가 아내의 뜻으로 오해하지 않을까 걱정해서였다.

비출산에 동참하는 20·30대 남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중견기업에서 근무하는 윤모(31)씨는 “낮은 확률로 결혼해도 비출산을 선택할 것”이라며 “현재 월급 수준으로 부모와 비슷한 수준의 환경을 자녀에게 만들어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직장인 전동주(25)씨도 “서울 토박이인 데다 직장도 서울이라 서울 밖에 집을 구할 생각은 없는데. 서울 안에선 전세집을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라며 “아이를 낳아 키우는 데 돈을 쓰기보다 아내와 해외여행을 다니는 등 부부를 위해서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男 출산 의향, 女보다 높지만…절반 겨우 넘어

 중앙일보가 여론조사업체 에스티아이에 의뢰해 지난달 27~28일 전국 만 20~39세 남녀 8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결혼과 출산에 대한 2030 세대 인식 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3.5%포인트) 결과, 20·30대에서 출산 의향이 있는 남성은 10명 중 6명이 채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 중 ‘자녀를 가질 의향이 있다’는 응답은 57.2%, ‘자녀를 가질 의향이 없다’는 응답은 33.5%였다. ‘반드시 자녀를 가져야 한다’는 응답은 50.0%, ‘자녀를 반드시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응답은 44.8%였다. ‘내 삶을 위해 자녀를 갖는 게 낫다’는 응답은 52.3%, ‘내 삶을 위해 자녀를 갖지 않는 게 낫다’는 응답은 29.1%였다. 모두 긍정적인 응답이 부정적인 응답보다 높았지만, 절반을 겨우 넘긴 수준이었다.

이삼식 한양대 고령사회연구원장(인구보건복지협회 회장)은 “전통적 성 역할이 세대가 거듭될 수록 희미해지면서, 출산에 대한 ‘비용’이 남성에게도 와 닿기 시작한 것”이라며 “‘아이는 부담스러운 존재’라는 인식을 남성들도 공유하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점점 개인을 중요시하는 문화로 변화하다 보니 내가 누려야 할 시간과 경제적 자산을 자녀 등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나누는 것 자체에 부정적인 것”이라며 “이는 남·녀 모두에 해당하는 이슈”라고 분석했다.

비출산 동참 의사는 20대 남성에게서 더 강하게 나타났다. 30대 남성은 ‘자녀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응답이 54.1%로 ‘반드시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응답(42.6%)보다 많았지만, 20대 남성의 경우 ‘자녀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응답이 45.8%로 ‘반드시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응답(47.1%)보다 낮았다. ‘내 삶을 위해 자녀를 갖는 게 낫다’는 응답도 20대 남성(49.2%)에서 30대 남성(55.4%)보다 낮게 나타났다. 다만, ‘자녀를 가질 의향이 있다’는 응답은 30대 남성(56.2%)과 20대 남성(58.0%)에서 각각 비슷하게 조사됐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20대男 “아이 낳지 않는 게 곧 부성애”

 20대 남성 사이에서 출산에 부정적인 인식이 더 높게 나타나는 건 취업과 주거 마련에 대한 불안감이 30대 남성보다는 더 큰 탓이다. 대학생 김모(23)씨는 “전교 1등을 하는 친구가 받는 사교육 수준을 보고 대학 진학은 역시 돈이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대학생이 된 뒤에는 그보다 더 많은 돈이 드는 걸 보고 일찌감치 2세 생각은 접었다”며 “굳이 아이를 낳아서 내 삶까지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사회초년생인 손모(26)씨는 “수도권에 전세를 구하더라도 계약 기간이 끝나면 떠돌이 생활을 해야 할 텐데 계속 전학을 다녀야 하는 아이는 무슨 죄냐”며 “낳지 않는 것이 곧 부성애”라고 말했다.

출산에 부정적인 여성들의 시각은 굳어져 가고 있다. 여성 응답자 중 ‘자녀를 가질 의향이 있다’고 답한 이들은 41.9%로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내 삶을 위해 자녀를 갖는 게 낫다’는 응답은 37.0%, ‘반드시 자녀를 가져야 한다’는 응답은 28.9%였다. ‘자녀를 가질 의향이 없다’(43.2%), ‘내 삶을 위해 자녀를 갖지 않는 게 낫다’(41.7%) ‘자녀를 반드시 가지지 않아도 된다’(66.9%)는 등 출산에 부정적 응답이 압도적이었다.

이는 결혼·출산에 따른 경력의 단절과 신체적 변화, 육아 부담 등을 더 크게 떠안아야 한다는 부담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일·가정 양립 지원’ ‘영유아 돌봄서비스 지원’ 등 비경제적 지원책에 대한 필요성도 여성(16.8%, 11.9%)이 남성(3.3%, 6.5%)보다 필요성을 더 크게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상림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성 역할 고정관념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주거나 취업 등 경제적 책임은 남성이 져야 한다는 문화가 있고, 여성은 독박육아로 손해를 본다는 인식이 많은 게 현실”이라며 “출생을 젠더적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부부와 가족 공동의 현실로 인식하려는 노력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출산율 0.73의 나라

男 “주거·일자리 우선” 女 “일·가정 양립, 돌봄 지원도”

한편, 설문조사에 응한 20·30대 남녀는 출산율 증가에 가장 효과적인 정책으로 공히 ‘신혼부부 또는 출산 가구 주거 지원’(남성 33.7%, 여성 23.6%) ‘안정적인 청년 일자리 확보’(남성 29.7%, 여성 24.1%) ‘출산 및 양육 비용 지원’(남성 19.8%, 여성 19.1%) 등 경제적 지원을 꼽았다.

전문가들도 노동시장의 왜곡을 저출생 심화의 구조적 원인으로 꼽고 있다. 최영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한국은 선진국과 비교해 노동시간이 길고 시간대비 임금이 낮으며 정규직 비정규직 임금격차가 심한 이중화된 노동구조를 보이고 있다. 생계·생존이 가능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결혼·출산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구조”라며 “20·30대의 출산율은 소득수준에 비례하는데, 청년 일자리의 질이 개선되지 않으면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정부 지원은 효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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