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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쿵이지였다” 100년 전 루쉰 다시 읽는 中 청년들

중앙일보

입력

차이나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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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선생은 알았을까? 본인이 쓴 단편소설《쿵이지》가 100년 후 중국 청년들의 마음을 이렇게 울릴 줄을.

📌루쉰(魯迅)

《광인일기》《아큐정전》 등을 쓴 중국의 문학가 겸 사상가. 근현대 중국 문학의 아버지로 통한다.

지난주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微博)에 ‘쿵이지 문학(孔乙己文學)’이라는 단어가 인기 검색어에 올랐다. 네티즌들은 “중학교 수업시간 땐 몰랐는데 이제서야 의미를 깨달았다” “사실은 내가 쿵이지였다” 같은 소감을 공유했다. 무슨 일일까?

웨이보 인기검색어에 오른 ‘쿵이지문학’. 사진 虎嗅網

웨이보 인기검색어에 오른 ‘쿵이지문학’. 사진 虎嗅網

쿵이지, 무슨 이야기야?  

‘쿵이지(孔乙己)’는 1919년 루쉰이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채 주점을 전전하는 주인공 ‘쿵이지’의 삶을 담고 있다. 소설은 주점에서 일하는 열두살 짜리 아이 시선으로, 봉건 지식인의 몰락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쿵이지. 사진 바이두백과

주인공 쿵이지. 사진 바이두백과

소설 속 쿵이지는 성공한 관리들이 입는 장삼(長衫)을 걸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장삼은 적어도 10년은 빨지 못한 듯 땟국에 절어 너덜거린다. 장삼을 입었으나 주점에 편히 앉지 못하고, 막노동꾼처럼 서서 술을 마신다. 이는 관료와 막노동꾼 사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쿵이지의 애매한 처지를 나타낸다.

사실 쿵이지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막노동꾼과 다름없다. 그러나 지식인의 환상에 사로잡혀 마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면서도 끝까지 장삼을 고집한다.

100년 전 나온 쿵이지, 다시금 회자 되는 이유는? 

쿵이지에 자신을 빗대는 중국 청년들. 사진 虎嗅網

쿵이지에 자신을 빗대는 중국 청년들. 사진 虎嗅網

최근 중국에서는 본인의 학력을 ‘쿵이지의 장삼’에 비유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졸업장을 땄지만,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마음에 들지 않고, 그렇다고 다른 것을 하기엔 고학력이 아까워 갈팡질팡하는 상황을 ‘쿵이지의 장삼’에 빗댄다.

“모두가 학력을 입신양명의 수단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서서히 이것이 스스로 내려올 수 없는 고지이자 쿵이지가 벗지 못한 장삼(長衫)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네티즌이 남긴 이 글은 수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며, 중국에서 ‘쿵이지 신드롬’을 일으켰다. 웨이보를 비롯한 현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본인을 쿵이지에 빗댄 청년들의 자조 섞인 넋두리가 유행처럼 퍼졌다. “내가 책을 읽지 않았다면 다른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하필이면 책을 읽었다”라는 쿵이지의 대사는 “내가 대학에 가지 않았다면 마음 편히 나사를 박을 수 있었을 텐데” 등으로 변형돼 청년들의 자기 풍자에 이용됐다.

사진 즈후

사진 즈후

쿵이지 열풍 뒤에는 취업 시장에 나온 중국 청년들의 불안과 혼란, 무력감이 담겨있다. 오늘날 쿵이지에 열광하는 네티즌 대부분은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자 청년들로, 중국에서 최악의 구직난을 경험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중국의 청년 실업률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특히 지난해 7월엔 16∼24세 청년 실업률이 통계 집계 시작 이후 가장 높은 19.9%를 기록했다. 코로나 19 충격으로 실업률이 급등한 데다, 지난해 중국 당국이 민간 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면서 역사상 최악의 실업난이 찾아왔다는 분석이다.

산업 지형 변화로 이공계 선호현상이 심해지면서, 문과생들이 체감하는 구직난은 더욱 심각하다. 지난 1일, 웨이보에선 상하이 소재 모 211대학 문과 졸업 석사생이 취업박람회에 갔다가 너무 낮은 처우 수준에 충격을 받았다는 사연이 화제를 모았다.

📌211대학

덩샤오핑 시대에 선정된 ‘21세기를 이끌 100여개의 명문 대학’으로, 베이징(北京)대, 칭화(清華)대 등이 해당한다.

사진 021視頻

사진 021視頻

이 남성은 이력서 5장을 준비해 박람회장을 5바퀴나 돌았지만, 회사들이 제시한 급여가 2500~5500위안(약 47~103만 원)으로 너무 적어 지원을 포기하고 돌아왔다는 내용의 영상을 공개했다. 이에 한 네티즌은 “우리는 몇 년 동안 공부해 다양한 지식을 배웠고 석사 학위도 받았지만, 여전히 좋은 삶을 살 수 없고 심지어는 도시에 발붙일 능력조차 없다”는 댓글을 남겨 많은 문과생을 울렸다.

지식이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

‘지식이 운명을 바꾼다’. 홍콩 최대 부호 리자청(李嘉誠)의 유명 어록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중국 청년들의 바이블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들어 ‘진짜로 지식이 운명을 바꿀 수 있나?’라며 반문을 제기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고등교육을 받은 구직자가 늘고 이들의 기대치는 높아지는데, 이를 충족할 양질의 일자리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배움의 의미 자체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중국 청년들. 우리와도 멀지 않은 현실이 더욱 씁쓸하게 느껴진다.

권가영 차이나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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