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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석만 논설위원이 간다

불법 낙태약 36만원이면 택배 거래, 가짜약도 판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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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국회 방치로 무법지대 놓인 낙태

윤석만 논설위원

윤석만 논설위원

헌법재판소의 위헌·헌법불합치 결정 뒤에도 후속 입법이 이뤄지지 않은 법률이 41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일부 법률은 개선 시한이 한참 지났는데도 기약 없이 방치되고 있다.

27일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현재까지 개정되지 않은 위헌 법률은 22건, 헌법불합치 결정 법률은 19건이다(1월 기준) . 이중 개정 시한이 지난 법률만 3건이다. 위헌은 결정 직후 법률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것이고, 헌법불합치는 즉각적인 위헌 결정으로 생기는 법적 공백의 혼란을 막기 위해 개정 시한을 두는 것을 뜻한다.

가장 논란인 것은 형법 269, 270조 낙태 조항이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헌법불합치 결정과 함께 2020년 12월 31일까지 보완 입법을 주문했다. 그러나 개정 시한이 2년 2개월이 지났지만 계속 방치되고 있다. 줄곧 감소 추세에 있던 낙태는 2019년부터 다시 늘기 시작해 2년 새 38% 증가했다.

무법지대에 놓인 낙태를 어느 시기, 어떤 방식으로 허용할지 법에 규정하지 않아 위험한 일들이 많다. 음성적인 미성년자의 임신중지는 물론 불법 약물 유통까지 판치고 있어 사회적 혼란과 비용이 점점 커지고 있다. 국회의 직무유기가 부른 낙태의 현실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헌법불합치 결정 후 4년째 무법
계속 줄다 위헌 2년새 38% 증가
“이념갈등 커, 표 떨어질까 외면”
입법공백 법률 41건 국회 방치


SNS로 불법 낙태약 주문

기자가 구매자로 가장해 대화를 나눈 한 낙태약 판매업자는 “한국에선 이 약이 유통될 수 없다”고 밝혔다. [사진 카카오톡 캡처]

기자가 구매자로 가장해 대화를 나눈 한 낙태약 판매업자는 “한국에선 이 약이 유통될 수 없다”고 밝혔다. [사진 카카오톡 캡처]

인터넷 검색창에선 낙태약 판매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구매를 원하면 1대 1 채팅으로 상담한 뒤 돈을 입금하고 택배로 받는 식이다. 여러 판매업자와의 대화 시도 끝에 구매자로 가장한 뒤에야 한 업자와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경구 낙태약 전문 판매업자로 자신을 소개한 A씨는 “한국에서는 약이 (불법이라) 유통될 수 없다”고 말했다. A씨의 이야기다.

약이 위험하진 않나.
“약은 정품이라 괜찮다. 경구약이기 때문에 수술보다 훨씬 간편하고 안전하다. 미프진이라는 약인데,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로 구성돼 있다. 7주차까지는 36만원이고, 8주차부터는 45만원이다. 가격이 다른 건 주차가 높아질수록 약의 용량이 커지기 때문이다.”
거래는 어떻게 하나.
“오후 4시 전까지 입금하면 내일 택배로 보낸다. 지역에 따라 2~3일 정도 후 받을 수 있다. 한국에서는 정식으로 약을 수입하고 싶어도 통관에서 막히기 때문에 약국 유통은 할 수 없다. 수백 명이 찾는 약이다. 원치 않는 임신이라 안타깝긴 해도 (낙태약 덕분에) 다행 아닌가.”
기자가 구매자로 가장해 대화를 나눈 한 낙태약 판매업자는“한국에선 이 약이 유통될 수 없다”고 밝혔다. [사진 카카오톡 캡처]

기자가 구매자로 가장해 대화를 나눈 한 낙태약 판매업자는“한국에선 이 약이 유통될 수 없다”고 밝혔다. [사진 카카오톡 캡처]

약 구매 의사를 재차 묻는 A씨에게 기자임을 밝혔더니 그대로 채팅창을 나가버렸다. 박한슬 약사는 “의사의 처방 없이 불법 유통되는 약물은 위험도가 높다”며 “정품인지 알 수 없고, 정품이라 해도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 불법 낙태약 복용은 안 된다”고 했다.

해외 승인 낙태약 국내선 불법

인터넷에선 불법 낙태약 판매 글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사진 네이버 블로그 캡처]

인터넷에선 불법 낙태약 판매 글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사진 네이버 블로그 캡처]

인터넷 약국을 가장한 불법 판매 사이트도 있다. OOO약국은 수십 개의 복용 후기를 올려놓고 구매를 유도한다. 홍보 페이지에선 스스로 전문 약사라 소개하며 영상을 통해 미프진을 설명한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승인된 제품임을 강조하고, 안전한 고객관리와 비밀보장을 내세우고 있다.

마치 자선단체인 듯 보이는 해외 사이트도 있다. 국내에선 사이트 접속이 불가능해 우회 프로그램을 깔아야 한다. 이들은 “98%의 확률로 임신을 중지하며 수백만 명의 여성이 안전하게 이 약을 썼다”고 홍보하고 있다. 영문 사이트지만 한국어로 설정을 바꾸면 쉽게 약을 구할 수 있다.

물론 미프진 자체는 여러 국가에서 승인된 약품이다. 하지만 국내에선 낙태 관련 법규가 없어 정식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미국과 유럽에서 몰래 들여온 약이나 불법으로 밀수해온 가짜 약이 판친다. 정품이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가짜 약은 임신부의 건강까지 해칠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6월 인천본부세관은 중국산 낙태약을 미국산으로 속여 판매해온 일당 6명을 적발했다. 이들은 중국에서 유통 중인 ‘미비사동편’ ‘미색전렬순편’ 5만7000여정을 밀수해 팔았다. 9정 1세트를 9만 원대에 구매해 미국산으로 포장지만 바꿔 36만 원에 판매했다.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은 “국내 낙태약 소비량이 연간 100만정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낙태는 한국에서 이미 자유방임 상태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낙태약을) 합법화한다 해도 여성들이 기록을 남기기 꺼리는데 의사의 복용지도를 받겠느냐”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청한 서울의 한 약사는 “미프진 수요가 많아 불법 유통이 점점 커지고 교묘해지는 느낌”이라며 “신고도 해봤지만 해외 사이트가 대부분이어서 (보건당국도) 행정처분 권한이 없다고 하더라”고 털어놨다. 그는 특히 “국회는 물론 정부조차 낙태와 불법 낙태약 유통을 방치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직무유기 국회 똑바로 해야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1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임신중지 여성의 46.9%는 인터넷을 통해 관련 정보를 얻었다. 의료인을 통해 상담하는 경우(40.3%)보다 많다. 평균 낙태 연령도 2018년 28.4세에서 27세로 낮아졌다(만 15~44세 대상 조사). 이중 미혼자가 절반이 넘고 7.7%가 불법 약물을 사용했다.

국회의 직무유기가 길어지면서 낙태와 불법 약물 유통은 더욱 노골적이 돼간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국회의 방치로 산모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이 충돌하는 무법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낙태법 입안과 관련한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헌법재판소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낙태죄는 필요하지만, 임신 몇 주차까지 낙태를 허용할지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산모의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 사이에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안을 국회가 고민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지금 상황에선 출산 직전인 38주차에 낙태해도 불법이 아니다.”
국회는 왜 손 놓고 있나.
“표가 안 되기 때문이다. 낙태 문제는 보수·진보가 갈리는 극명한 이슈다. 종교계에선 근본적으로 낙태를 반대하고, 여성계에선 산모의 뜻을 우선한다. 첨예한 갈등 탓에 정치권이 나서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회가 아니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입법 사항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얼마 전 10대들이 자주 찾는 룸카페에서 성행위가 만연하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청소년 낙태 문제도 심각하다. 국회가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 국민적 합의를 모아야 한다. 여성의 인격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조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 여야가 싸움만 하지 말고 진짜 할 일을 해야 한다.”

법무부는 헌법재판소의 주문에 따라 2020년 11월 낙태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개정안에는 임신 14주까지는 임신부의 결정에 맡기고, 이후 24주까지는 성범죄·질환 등의 사유가 있을 때 조건부로 허용하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이 법안은 국회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입법 미비로 국민투표도 못 해…집시법은 개정시한 12년 지나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한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10, 23조는 헌법불합치 결정 후 개정시한(2010년 6월)이 한참 지났지만 아직 무법 상태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집회금지 시간이 광범위하다는 뜻이었지 야간 집회를 전면 허용하라는 취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입법 미비로 사실상 24시간 집회가 허용되고 있다. 일선 현장에선 ‘사생활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제한할 수 있다’(8조)는 다른 조항을 끌어들여 대응하고 있다.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이 제안한 ‘검수완박’ 국민투표가 무산된 배경도 입법 미비 탓이 크다. 당시 중앙선관위는 “국민투표법 14조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실시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14조는 재외국민이 국민투표를 하려면 주민등록이 있거나 국내 거소가 신고돼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헌법재판소는 “거소 신고 없이도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며 2015년 12월까지 법 개정을 요구했지만 아직 무법 상태다.

음주운전이나 2회 이상 음주측정 거부자를 가중 처벌하는 ‘윤창호법(도로교통법)’, 국회 정보위원회 회의를 비공개하도록 한 국회법 조항 등도 위헌 후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 피의자 구속 기간을 최대 50일까지 연장케 한 국가보안법 19조는 1992년 위헌으로 결정됐지만 현재까지 방치되고 있다. 익명을 요청한 한 헌법재판관은 “국회가 단독 법안을 밀어붙이며 입법권을 행사할 때는 언제고, 꼭 필요한 법 개정은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