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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성탁 논설위원이 간다

“가정폭력 못 견뎌 나왔는데 부모 때문에 지원 못 받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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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사각지대에 놓인 ‘탈 가정 청년'

김성탁 논설위원

김성탁 논설위원

“엉망진창이에요. 늘 생활고에 시달리고 가족에게 괴롭힘당하는 악몽을 꿔 정신과 치료를 받습니다. 우울장애와 공황장애라는데, 중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고통을 겪고 있어요.”
 조모(27)씨는 2년 전 집을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 부모의 정서적·육체적 학대를 견디다 못해서였다.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려다 집으로 가 짐을 싸고 무작정 떠나왔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 탈출하고 싶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울타리를 떠나니 당장 머물 곳과 식비 마련이 어려웠다. 조씨는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지금 선택이 나름 만족스럽다”고 했다.

탈 가정 청년이 지난해 10월 진행된 치유 프로그램에서 과거 자신이 상처받았던 상황에 대해 상대방에게 독백하고 있다. [282북스]

탈 가정 청년이 지난해 10월 진행된 치유 프로그램에서 과거 자신이 상처받았던 상황에 대해 상대방에게 독백하고 있다. [282북스]

 36살 A씨는 8년 전 집을 벗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이래서 안 돼, 저래서 안 돼’라며 옷이나 행동까지 많은 것을 제한했습니다. 키가 훨씬 큰 남동생에게 양손을 잡혀 침대 위로 밀쳐진 뒤로 집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껴졌어요. 방문을 잠그고 아무것도 못 할 때 친구가 여성 쉼터를 알려주더군요.”
 쉼터를 나와야 했을 때 A씨는 집에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이후 여기저기 생활비 대출을 받아 지내고 있다. 무력감에 빠지기 일쑤다. “행정 관청이나 경찰로부터 가족 관련 서류가 갑자기 날아오고, 병원에서 내 개인정보를 동의 없이 엄마에게 알려줘 난감한 적이 있습니다. 2년 전쯤 아빠에게 ‘네가 맞을 만하니 맞았겠지’라는 문자를 받고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집 벗어나면 야생에 노출된 상태”

 한국 사회에선 그동안 ‘탈(脫) 가정 청소년’을 지원하는 작업이 진행돼 왔다. 과거 ‘가출 청소년’으로 불리다 부정적 인식을 없애기 위해 ‘가정 밖 청소년’이란 용어가 쓰인다. 국내 청소년 기본법상 9~24세가 청소년이다. 가정이 없거나 가정으로부터 이탈된, 또는 가정 내 보호자가 적절한 양육 능력이 없는 경우가 해당한다.

 가정 밖 청소년은 아동 양육시설이나 위탁 가정에서 생활하거나 청소년복지시설에 들어가기도 한다. 법무부가 위탁·운영하는 청소년자립생활관도 이용할 수 있다. 이런 체계에 들어가지 않고 적당하지 않은 주거 환경에 노출된 경우도 있지만, 청소년 지원책은 어느 정도 작동 중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하지만 최근에는 만 19세부터 30대 중반에 해당하는 청년층에서도 스스로 가정을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유는 다양하다. 우리 사회 소수 그룹의 안정을 돕기 위해 사회적 처방 프로그램을 만드는 예비사회적기업 ‘282북스’가 지난해 탈 가정 청년들을 만나 처한 현실과 어려움 등을 파악했다. 탈 가정 청년 60명 설문조사에 따르면 스스로 집을 떠난 이유로는 ‘정서적 학대’가 91.2%(중복 응답)로 가장 많았다. 신체적 학대인 가정폭력(59.6%)이 다음이었다. 이어 부모의 방임(36.8%), 성 정체성 아우팅(7%) 등의 순이었다.

 282북스 강미선 대표는 “가정폭력을 처음 당했다고 바로 집을 나오지는 않는다”며 “주변에 도움을 받을 곳이 없어 무기력한 상태를 지속하다 도저히 더는 안 되겠다고 집을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살아야겠다고 집을 막상 벗어나면 그야말로 야생에 노출된다”며 “어렸을 때부터 정신적·육체적 어려움을 겪은 이들은 집을 나와서도 심각한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정서적 학대, 신체 폭력, 부모 방임 등으로 집 나온 청년들 늘어
'가정 밖 청소년'에 비해 청년들은 ‘자립 가능' 이유로 지원 빈약
부모가 주소 알 수 있어 거주 불안…알바에 지치고 우울증 시달려
30세 미만 결혼해야 단독가구, 부모 소득에 걸려 기초수급 어려워

 "원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나와" 

 기본적으로 청년층에 대해선 자립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직접 소득에 도움을 주는 사회적 지원책이 많지 않다. 탈 가정 청년에 대해선 아직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실정이다. 대부분 가정과의 절연은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알아서 생활해야 하는데, 구조적으로 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존재한다.

 가정폭력 등으로 집을 나온 청년들은 대부분 주소를 본인 명의로 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국내 제도상 부모가 자녀의 주민등록등본을 열람할 수 있기 때문에 부모가 주소지로 자녀를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견딜 수 없어 분리를 택했는데 부모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셈이다. 주소지 분리가 어렵다 보니 기본적인 복지나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

 혼자 독립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등록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현행 제도상 30세 이상은 단독 세대주가 될 수 있지만, 30세 미만의 경우 결혼을 해야 세대 분리가 가능하다. 청년 혼자라면 단독 가구여야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청이 가능하다. 30세 미만이 단독가구로 분리되려면 계속 중위소득 40% 이상의 수익이 있어야 하는데, 탈 가정 청년들에겐 꿈 같은 얘기다. 세대주가 되지 못한 경우 독립 가정으로 집계되지 않아 전 국민에 지급된 1차 재난지원금 대상에서도 빠졌다.

 '가족 소득' 지원 기준 달리 적용해야   

 특히 국내 청년 정책은 보호나 돌봄 자체가 아니라 역량을 강화해 자립하도록 돕는 데 초점을 둔다. 특히 원 가족의 소득을 기준으로 청년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이어서 탈 가정 청년 지원에 공백이 생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탈 가정 상태인 박모씨는 “갑작스럽게 집을 나오면 모아둔 돈은 보증금으로 나가고 여윳돈이 아예 없기 때문에 아르바이트 등 일을 과도하게 많이 하게 된다”며 “대학 학비를 못 내 중단하는 경우는 흔하다”고 전했다. 탈 가정 청년들 사이에선 “LH 주거 지원이나 청년 전세임대를 알아봤는데 가족관계증명서상으로 부모와 엮여 있다 보니 소득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라거나 “수입이 없어 동사무소를 찾았더니 신청에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했다"는 반응이 흔하다.

 2020년 탈 가정 청년 실태조사를 실시한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은 보고서에서 “중산층 이상 가정의 청년들까지 지원하면 세 부담 역진성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가구소득이 수혜자 선정 기준으로 쓰인다”면서도 “가구소득이라는 유일한 선별기준이 탈 가정 청년과 같은 정책의 사각지대를 낳는 배경이 되는 만큼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탈 가정 청년들을 관찰해온 이들은 최근에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과도한 애착으로 인해 가정 내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집에서 나온 지 1년 정도 된 K(29)씨는 “부모의 가스라이팅, 정서적·성적 학대가 있다면 가족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피해자와 가해자로 봐줬으면 좋겠다”며 “가족이라는 가해자로 인해 주눅이 들고 학교에서 왕따 피해를 봐도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18세 이상의 '자립준비청년' 범주 넓혀야"

‘282북스’ 강미선 대표 인터뷰 

예비사회적기업 282북스 강미선 대표. 김성탁 기자

예비사회적기업 282북스 강미선 대표. 김성탁 기자

"청년들이 처한 여건이 다양해 탈 가정 청년만 대상으로 별도 지원책을 도입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고아원이나 가정보육원 등에 있다 보호 종료로 18세에 나오는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지원책이 막 생겨나고 있는데 그 범주를 넓혀 탈 가정 청년을 지원했으면 합니다."

282북스 강미선 대표(사진)는 지난해 탈 가정 청년들을 면담하고 콜로키엄을 진행하며 실상을 파악했다. 지난 26일 서울 양평동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우선 다양한 궤도로 살아가는 청년들의 삶을 인정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정 밖 청소년보다 청년들은 집을 나오면 기댈 곳이 없다는데.
"청소년은 가정폭력 등이 이유가 아니더라도 밖으로 나오면 센터 등 갈 곳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청년은 '그냥 따로 사는 것 아닌가'라고들 생각한다. 청년 여성이라면 가정폭력센터 등 몇몇 갈 곳이 있지만, 청년 남성은 이용할 시설 자체가 별로 없다. 그래서 노숙자 쉼터를 찾아가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학대나 폭력을 경험해 심리적으로 닫혀 있는 상태여서 낯선 곳에 적응이 힘들다. 대다수가 어떤 도움이 있는지 자체를 모르고, 기댈 곳 자체가 없다."

-부모가 찾아올까 봐 주소지를 친구 자취방 등으로 둔다는데.
"부모가 가해자인 만큼 등본 열람을 못 하게 신청할 수 있는데, 가정폭력을 당했다는 행정처분 서류와 진단서 등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런 절차를 잘 안내하고 서류 발급을 간소화해주면 좋겠다. 일정 조건에 해당하는 청년은 30세 미만이면서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단독 가구가 될 수 있도록 해 단절의 목적을 살리면서 기초생활보호나 주택 지원 등에서 부모 소득에 얽매이지 않도록 해주는 것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