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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판사도 선고 유예를 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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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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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불법 출국금지로 이규원 검사가 지난 15일 징역 4개월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무죄 선고에 가까운 처분이다. 이 검사가 거짓 정보(수사가 종결된 사건의 번호 등)를 넣어 만든 서류로 위법한 출금이 이뤄졌다는 것은 재판부가 인정했다. 하지만 김 전 차관 사건 재수사가 예정돼 있었고, 이 검사가 사적 이득을 취하려고 한 게 아니고, 긴급출금이 아니라 일반출금을 택하면 거짓 정보를 넣은 서류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몰라서 벌인 일이라며 선처했다. 하나씩 따져 본다.

수긍 안 되는 김학의 출금 재판 #곽상도, 윤미향 건도 불신 키워 #AI였다면 빨리 끝내기는 했을 것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출국을 불법적으로 막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규원 검사(가운데)가 1심 선고 공판이 끝난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출국을 불법적으로 막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규원 검사(가운데)가 1심 선고 공판이 끝난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①“재수사 거의 확실시”: 판결문에 ‘(김 전 차관이) 당시 입건된 피의자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재수사가 거의 확실시되는 사건의 핵심 인물이어서 출국금지 대상인 ‘범죄 수사를 위하여 출국이 적당하지 아니하다고 인정되는 사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었다’고 적혀 있다. 어차피 수사를 받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당시 검찰총장이 김 전 차관 재수사 방식에 대해 몇몇 간부와 의논했다는 것과 법무부 고위 간부 회의에서 김 전 차관 출금 방안이 논의됐다는 것을 ‘재수사 확실시’ 판단의 근거로 제시했다.
 이 검사와 함께 과거사 진상조사단에서 일한 박준영 변호사는 “김 전 차관 출금 전까지 조사단에서 재수사 필요성에 대한 보고를 결정하지 않았다. 조사단이 검찰 과거사 위원회에 보고해야 그 위원회가 검찰에 수사 의뢰를 할 수 있는 것인데, 보고가 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청와대·법무부·검찰이 재수사를 위해 물밑에서 뭔가 작업을 했을 수도 있지만, 공식 절차 안에서 재수사가 기정사실화된 것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긴급출금 요청서에 사건 번호를 적게 돼 있는데, 김 전 차관 재수사가 결정되지 않았으니 그가 입건되지 않았고, 따라서 사건번호가 없었다. 이 검사가 수사가 끝난 사건의 번호를 기재했다.

②“사적 이익 위한 것 아니었다”: 판결문에 ‘피고인이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하여 위 각 범행을 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이 사건 각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나 동기에 특히 참작할 바가 있다’고 쓰여 있다. 재판부는 검사가 무엇 때문에 가짜 사건번호까지 적으며 출국금지 요청서를 만들었다고 봤을까. ‘재수사가 임박한 주요 사건 당사자의 해외 도피를 차단하기 위함이었을 뿐’이라고 판결문에 적혀 있다. 나름의 정의감 발동을 동기로 본 것 같다. 하지만 정치적 이해관계나 신념, 또 이른바 ‘출세’를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 판사는 어떻게 ‘사적 이익’을 위한 게 아니었다고 단정하게 됐을까. 궁예의 관심법, 사또 재판 역사가 떠오른다.

③“일반출금으로 하면 됐을 일”: 재판부는 이 검사가 긴급출금이 아니라 일반출금을 택했다면 요청서에 가짜 사건번호를 적고 소속 검찰청의 검사장에게 승인을 받은 것처럼 서류를 꾸미지 않았어도 됐다고 설명했다. 일반출금을 했다면 범법을 하지 않고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기에 크게 죄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사형 선고를 받을 사람에게는 검사가 가짜 증거를 몇 개 더 붙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과 뭐가 다른가. 재판부는 독립 기관인 각 검사가 출금을 요청하면 수사 착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식 입건 절차가 없어도 대상자가 피의자 신분이 된다고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이 판결이 상급심에서 그대로 확정되면 모든 검사가 수사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에 대해 곧바로 출금 조처를 할 수 있게 된다.

김 전 차관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법치의 핵심 전제 조건인 절차적 정당성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 건과 더불어 곽상도 전 의원 50억원 무죄 판결, 윤미향 의원 사건 판결 등으로 재판의 공정성이 의심받고 있다. ‘챗GPT’ 열풍 속에서 인공지능(AI) 판사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다. AI 재판관도 이 검사에게 무죄에 가까운 판결을 내릴까. 결과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렇게 재판이 장기화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