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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시각각

돌고 돌고 돌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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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외환위기 이전의 시중은행은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신탁)’가 주도했다. 1990년대 신한·한미·외환 등 신설 또는 전환 은행이 추가되면서 1997년 말 시중은행이 16개에 달했다. 경제개발기 30여 년간 은행은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재무부 사람, ‘모피아’ 전성시대였다. 재무부 이재국(금융정책·산업 담당국) 사무관 한마디에 은행장과 임원들이 벌벌 떨던 시절이었다. 은행 주식 하나 없었지만 정부가 은행 경영진 인사를 했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도 망하는 시대가 왔다. 은행의 수익성이 중요해졌다. 은행 부실로 더 이상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컸다. 2001년 정부의 공식 자료에서 ‘금융기관’이란 단어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금융회사’가 차지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익이 나면 자신들만의 성과급 잔치를 벌이면서 사고만 터지면 결국 국민 세금을 축내는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가 국내외에서 도마에 올랐다.

은행 ‘금융기관’에서 ‘금융회사’로
공공성 있지만 공공재 표현은 잘못
당국은 화풀이 대신 정책 내놔야

지난해 4대 금융지주가 50조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이자이익만 40조원이다. 본업을 잘했다는 칭찬은커녕 따가운 시선이 쏟아진다. 은행이 제 실력보단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상과 금융감독원의 예금·대출금리 인하 압박 덕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눈치 없이 성과급과 명퇴금 파티를 벌였으니 스스로 매를 번 측면이 있다.

감독 당국의 금리 규제는 시장원리에 어긋나지만 통화정책을 보완하는 고육책이기도 하다. 내외 금리차로 인한 외자 유출을 피하려면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을 어느 정도 따라가야 하고 대내적으로 물가도 잡아야 한다. 1800조원의 가계부채에 짓눌린 이들을 외면할 수도 없다. 하지만 땜빵 정책이 계속되면 나중에 충격에 더 취약해진다는 점에서 지속 가능한 대책은 아니다(강경훈 동국대 교수).

윤석열 대통령의 “은행은 공공재” 발언 이후 이복현 금감원장이 연일 은행권을 압박하고 있다. 은행을 향해 ‘약탈적’이라는 강한 표현을 썼고, 은행권이 급하게 내놓은 향후 3년간 10조원의 사회공헌도 마뜩잖아 했다. 지금처럼 화풀이하듯 구두개입으로 몰아치는 대신, 차분히 정책을 고민했으면 한다. 오픈뱅킹을 꾸준히 확대하고 금리 공시나 계좌 이동의 실효성을 높이는 게 정공법이다. 은행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빅테크의 금융업 진출 확대인 만큼, 금산분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규제 틀을 모색해 볼 때도 됐다. 인터넷은행의 업무 영역을 더 확대하지 않는 한, 인터넷은행 하나 추가한다고 시중은행은 눈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골프대회 같은 사회공헌이 아니라 취약계층 채무조정 등 은행 본업에 맞는 사회공헌을 따로 뽑아 공시하고 경쟁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막판까지 가서 빚잔치하는 것보다 채무조정을 하는 편이 은행에도 더 이득이다.

은행은 공공성이 있다. 주주의 돈(자본)보다 훨씬 많은 고객 예금을 밑천으로 장사한다. 망하면 은행 시스템 전체에 충격을 준다는 점에서 시장에만 맡길 일도 아니다. 은행과 고객 간의 정보 격차가 커서 불완전판매 같은 소비자 보호 이슈도 있다. 금융 규제가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은행은 공공재’라는 대통령 발언은 정확하지 않다. 공공재는 국방이나 치안 서비스처럼 돈 내지 않아도 소비할 수 있어 무임승차가 가능하고, 내가 쓴다고 남의 소비량이 줄지 않는 재화를 가리킨다. 은행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공공재가 아니다. 앞으로 대학 경제학개론 수업에서 ‘은행은 공공재인가’를 묻는 시험이 단골로 나오고 그때마다 윤 대통령의 발언이 예시로 나올 것 같다.

은행 공공성만 강조하다 거덜이 났고, 수익성을 따지다 어느새 은행이 수십조원 움켜쥔 밉상이 됐다. 다시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는 시대다. 공공성 강조하다 안정성이 흔들리지 않도록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그래도 봄은 곧 올 것이다. 전인권의 노래처럼 꽃이 피고 새가 날고 다시 돌고 돌고 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