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상렬의 시시각각

바이든의 일자리 자랑이 부럽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이상렬 논설위원

이상렬 논설위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일자리 자랑이 솔직히 부러웠다. 지난 7일 73분간의 국정연설(State of the Union Address) 얘기다. 그는 취임 후 2년간 1200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자찬했다. “40년 만에 가장 빠른 속도로 80만 개의 고소득 제조업 일자리를 만들었다”고도 했다. 빈말이 아니다. 미국은 지금 일자리 풍년이다. 고용시장이 너무 뜨거워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 인상 페달을 계속 밟을 기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월 7일 미 의회에서 국정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월 7일 미 의회에서 국정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정치인들의 일자리 치적 홍보는 유별나다. 대중 앞에 서면 언제나 일자리 몇 개를 만들었노라고 내세운다. 자유시장경제의 본산, 자본주의의 나라여서 그런가. 일자리가 개인 존엄의 원천이고 가정 행복의 울타리임을 국민도 알고, 정치인도 안다.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정치인은 유권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정치인은 일자리를 한 개라도 늘리려고 몸이 부서져라 뛴다. 괜찮은 보수와 복지 혜택이 제공되는 ‘양질의 일자리’가 있으면 노후도, 의료비도, 교육도 자력 해결이 가능하다. 그래서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고 한다.

미국, 투자유치 위한 입법 총력전
고소득 제조업 일자리 대거 생겨
일자리 무관심 한국 정치와 대조

바이든은 자랑할 만하다. 자국 우선주의라는 국제적 비판에 개의치 않고 미국 내 일자리 창출을 위한 토대를 열심히 깔았다. 바이든 행정부가 역점을 둔 인프라 투자법, 반도체 칩과 과학법,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모두 미국 내 투자와 생산을 촉진해 일자리 창출로 연결되도록 짜여 있다. 엄청난 세제 지원과 인센티브, 시장 진입 장벽 등을 통해 미국에서 공장을 돌릴 수밖에 없게 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8월 9일 반도체 칩과 과학법에 서명하자 의원들과 기업인들이 환호하고 있다. 이 법은 향후 5년간 총 2800억 달러(약 366조원)를 투자하는 것이 골자다.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8월 9일 반도체 칩과 과학법에 서명하자 의원들과 기업인들이 환호하고 있다. 이 법은 향후 5년간 총 2800억 달러(약 366조원)를 투자하는 것이 골자다. 연합뉴스

바이든의 자랑인 제조업 고소득 일자리엔 한국의 기여가 크다. 삼성(반도체), 현대차(전기차), SK(반도체·배터리), LG(배터리) 등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들이 수백억 달러를 투자해 미국 현지 공장 설립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 미국 비영리단체인 ‘리쇼어링(해외 진출 기업의 본국 회귀) 이니셔티브’는 리쇼어링과 FDI(외국인 직접투자)를 통해 신규 일자리 35만 개 이상이 미국에서 생겨날 것으로 예상했는데, 일자리 기여가 큰 국가 1위가 한국이다. 34곳의 한국 기업이 3만5000개 이상 일자리를 창출할 예정으로 조사됐다.

그 일자리가 한국에서 생겨난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경제 논리를 우선시하는 게 기업이다. 기업 하기 좋은 곳에, 수익을 내고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곳에 공장을 세운다. 미국이라는 거대 시장, 미국 주도의 공급망 재편, 연방·지방 정부의 파격적 지원을 고려하면 한국이 아니라 미국 땅에 공장을 짓는 선택을 나무라기 어렵다.

문제는 국내 고용시장이다. 제조업 일자리 위축이 소리 없이 진행 중이다. 1월 기준 제조업 취업자는 1년 전보다 3만5000명 줄었다. 그나마 60세 이상에서 9만여 명이 늘어 전체 감소 폭을 줄였다. 청년층부터 60세 미만까지의 연령층에선 12만6000명이나 줄어들었다. ‘일자리가 최고 복지’라고 말하기 민망한 초단기 일자리가 급증세다. 5년 전인 2018년 1월과 비교하면 전일제 근무로 간주하는 주당 36시간 이상 취업자는 88만 명 줄고, 주휴수당과 퇴직금도 없고 직장 건강보험 가입도 안 되는 1~14시간 취업자는 48만 명 늘었다.

이렇게 고용시장에 빨간불이 들어와 있는데도 한국 정치는 딴 세상에 가 있다. 반도체산업 지원법 등 일자리를 만드는 법안은 멈춰서 있고, 기업인들이 파업 만능주의를 초래한다고 우려하는 ‘노란봉투법’은 거대 야당의 주도로 국회 문턱을 넘기 직전이다. 우리 정치는 일자리를 지키고 늘리는 데 투철하지도, 유능하지도 않다. 이익단체에 휘둘리고, 투자 환경 개선은 뒷전이다. 양질의 일자리가 없어 삶이 곤궁해진 국민에겐 나라가 해결해 주겠다고 생색을 낸다. 그렇게 나랏빚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일자리를 없앤 입법자들은 죄책감 없이 정치 무대를 누빈다. 생각해 보니 물정도 모르고 미국 일자리 호황을 부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