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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현지교수 지진 증언 "집 가기 겁나…10만명 사망 얘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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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례 강진 경고했는데 무시해 최악의 재난이 됐다. 그래도 우린 빨리 극복할 수 있다.”

튀르키예(터키) 남동부와 시리아 서북부를 강타한 지진이 튀르키예 사상 최악의 인명 피해를 내고 있다. 튀르키예 정부가 14일(현지시간) 발표한 지진 사망자는 4만명에 육박하며 1939년 12월 동북부 에르진잔 지진 피해(3만2968명 사망)를 뛰어넘었다.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재난을 겪은 튀르키예인들은 지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튀르키예 중부 카이세리에 사는 괵셀 튀르쾨쥬(51)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14일 중앙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런 강진을 처음 겪은 10세 딸이 무서워해서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면서 “피해가 극심한 동남부 지역 사람들은 어떻게 견디고 있을지 가늠이 안 된다”고 걱정했다. 튀르쾨쥬 교수는 유창한 한국어로 부실 공사 등으로 건물이 붕괴해 인명 피해가 커진 상황을 비판하고, 살아남은 생존자를 위한 지원을 호소했다.

14일 튀르키예 남동부 하타이주에서 사람들이 지진으로 인해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발견된 시신을 가방에 넣어 이동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14일 튀르키예 남동부 하타이주에서 사람들이 지진으로 인해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발견된 시신을 가방에 넣어 이동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6일 지진이 일어났을 때 튀르키예 중부 카이세리에서도 진동을 느꼈나.
“오전 4시 17분에 남동부 가지안테프에서 일어난 첫 지진 때는 자다가 집이 흔들려서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다시 집에 들어갔는데 오후 1시 24분에 카이세리와 약 200㎞ 떨어진 카라만마라슈에서 일어난 두 번째 지진은 더 심하게 흔들렸다. 10세 딸이 아주 무서워해서 그날 밤 자동차에서 자고, 다음날 본가와 처가가 있는 수도 앙카라에 와서 머물고 있다. 이 정도 규모의 지진은 살면서 처음 느껴본다. 강진이 하루에 2번이나 일어나면서 1999년 8월 북서부 이즈미트에서 일어난 지진(규모 7.8)보다 강한 느낌이었다. 카이세리는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아나톨리아 단층 지역이 아닌데도 건물이 많이 흔들렸다. 대다수 주민이 밖에 나와 자동차에서 머물렀다. 동네 사람들이 13일 밤에도 여진이 느껴졌다고 해서 집에 돌아가기가 겁난다.”

“지금도 집에 돌아가기 겁나”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비상사태가 선포된 10개 주(州)는 피해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들었다. 
“가지안테프·카라만마라슈·하타이 등 대부분 가봤던 곳이다. 아파트 등 건물은 물론 유명한 유적지까지 무너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사진 찍었을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특히 하타이 지역 피해가 크다. 하타이 공항은 한동안 운영을 못 했고, 지중해 인접 도시 이스켄데룬은 지진 이후 해수면이 상승해 도로가 바닷물에 잠겼다. 그곳에 있는 지인들은 집은 무너졌지만 다행히 살아있다. 다만 학교 제자 가족 등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어 마음이 무겁다. 피해 지역에는 벨기에(1200만명) 인구와 비슷한 약 1350만명이 거주했다. 사망자가 4만명에 육박하는데 앞으로 10만명까지 늘어날 수도 있다고 들었다. 전쟁보다 심각한 상황이다.”
지난 6일 튀르키예 남동부를 강타한 지진으로 건물 잔해에 깔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세계 80여개국에서 9000여명의 구조대가 파견됐다. 이에 감사함을 전하는 포스터가 제작돼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공유되고 있다. 사진 트위터 캡처

지난 6일 튀르키예 남동부를 강타한 지진으로 건물 잔해에 깔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세계 80여개국에서 9000여명의 구조대가 파견됐다. 이에 감사함을 전하는 포스터가 제작돼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공유되고 있다. 사진 트위터 캡처

“역시 한국은 형제의 나라”

일주일이 넘었지만 구조대 노력으로 기적의 생존자도 나오고 있다.
“튀르키예 구조대를 포함해 세계 80여 개국에서 9000여명 구조 인력이 와서 약 8000명을 구해줬다.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그림이 소셜미디어(SNS)에서 널리 퍼지고 있다. 한국 긴급 구호대의 구조 소식도 현지 뉴스와 SNS를 통해 알려졌다. 또 삼성·현대·LG 등 한국의 대기업과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 등 유명인사들이 상당한 금액을 기부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역시 ‘형제의 나라’라며 다들 고마워한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제자 10여명도 한국 구호대와 관계자 통역을 위해 여진 위험에도 피해 지역에 들어갔다.”
지난 14일 튀르키예 남동부 카라만마라슈에서 수백채의 건물이 무너진 모습. 지난 6일 발생한 강진으로 튀르키예 남동부 10개 주에서 최소 4만1500채 건물이 무너지거나 파손됐다. AFP=연합뉴스

지난 14일 튀르키예 남동부 카라만마라슈에서 수백채의 건물이 무너진 모습. 지난 6일 발생한 강진으로 튀르키예 남동부 10개 주에서 최소 4만1500채 건물이 무너지거나 파손됐다. AFP=연합뉴스

튀르키예는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데 이번에는 대비가 부족했던 것 같다.
“튀르키예에는 지진을 연구하는 지질학자 등 전문가가 많은데, 몇달 전부터 아나톨리아 단층 움직임을 포착했고 지진이 크게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를 관계자들에게 수차례 알렸지만 대부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소 4만1500채 건물이 무너지거나 파손됐는데, 부끄럽지만 부실 공사 때문이다. 1999년 대지진(사망자 1만7000여명)이 발생한 뒤 여러 차례 내진 규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감시 역할을 일부 사설 기관에도 맡기면서 뇌물을 받는 등 비리가 생겼고, 정부는 내진설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건축물에는 사면 조치를 적용했다. 이를테면 원래 설계대로 집을 짓지 않거나 안전 규제를 위반하면 불법인데, 벌금을 내고 법적 책임을 면제해 피해가 커졌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코로나, 고물가 이어 강진…너무 힘들다” 

이런 정부의 대처에 불만을 표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렇다. 미리 대비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해 최악의 재난이 됐다. 정부는 뒤늦게 부실 공사 책임이 있는 건축업자 100명 이상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는데, 처벌이 세지 않아 대다수가 징역 몇 년형에 그칠 것이다. 1999년 지진 후에도 부실 시공업자들이 법적 심판을 받았지만 몇 년 후에 감옥에서 나와 일을 하고 있다. 튀르키예는 지난해 극심한 가뭄과 산불에 시달렸고, 코로나19 사태 이후 급격한 물가 상승으로 경제적 고통이 큰 상태에서 강진까지 일어나면서 너무 힘든 상황이다.”
강진으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이 14일 튀르키예 카라만마라슈의 피난민 캠프 주변에서 불을 피워 추위를 이겨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강진으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이 14일 튀르키예 카라만마라슈의 피난민 캠프 주변에서 불을 피워 추위를 이겨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우리는 공동체…혼란 극복할 것”

이제 이재민 지원에 집중해야 한다.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 
“이재민들은 튀르키예 곳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정부는 이들에게 대학 기숙사를 제공할 예정이다. 이에 튀르키예 전역의 모든 대학은 원격수업을 하기로 했다. 학생들은 각자 집에서 수업을 들어야 한다. 아직 피해 현장에 남아있는 이재민에겐 텐트와 이불 등이 필요하다. 밤에는 기온이 영하 20~25도까지 떨어지는 등 매우 춥고 눈도 내리는 곳이 있다. 물·음식·의료품 등의 지원도 중요하다. 나도 앙카라 시내에서 식품 등 구호 물품을 지원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솔직히 현 상황을 제대로 수습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건물은 전부 철거하고 새로 지어야 한다. 그래도 튀르키예는 공동체 의식이 강한 나라다. 이 혼란을 빠른 시일 내에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괵셀 튀르쾨쥬 예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가 14일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서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이재민을 돕기 위해 식품 등 구호 물품을 지원하는 봉사활동에 참가했다. 사진 괵셀 튀르쾨쥬 제공

괵셀 튀르쾨쥬 예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가 14일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서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이재민을 돕기 위해 식품 등 구호 물품을 지원하는 봉사활동에 참가했다. 사진 괵셀 튀르쾨쥬 제공

1972년 앙카라에서 태어난 튀르쾨쥬 교수는 1994년 앙카라대학교 어문역사지리학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한국어교육학 석·박사(1996~2004) 학위를 받았다. 2006년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2020년에 튀르키예에서 문을 연 유라시아 한국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또 한강의 『채식주의자』, 안도현의 『연어』 등을 튀르키예판으로 번역했다. 2012년에는 한국어 발전과 보급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 정부가 수여하는 대통령 훈장을 받았고, 2017년에는 한국문학번역원이 수여하는 ‘최우수 번역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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