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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건축 용인' 정책 역풍..."에르도안 정부, 강진에 무너질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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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신화=뉴시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신화=뉴시스

튀르키예에서 5월 대선을 불과 3개월 앞두고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에 대한 책임 문제가 대선 변수로 떠오르게 됐다고 미 정치전문매체 포린폴리시(FP)가 13일(현지시간) 지적했다. 매체는 “참사에 대한 충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부의 부실 대응에 대한 분노로 바뀌고 있다”며 “지진에 취약한 튀르키예의 건물들처럼 에르도안 정부가 무너져 내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번 대지진으로 튀르키예에서 이재민은 최소 100만 명 발생할 것이란 예상이다. 이재민들은 임시 대피소가 부족해 길거리에서 나무를 모아 불을 피우며 잠을 자고, 식량 공급과 위생 문제 등 일상 전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튀르키예 정부군의 현장 투입도 재난 발생 이틀 뒤에나 이뤄지는 등 구호 조치도 더뎠다고 FP는 지적했다. 이번 대지진으로 인한 튀르키예와 시리아 양국의 사망자 수는 13일 기준 3만7000명을 넘어섰다.

이와 관련 피해 지역인 튀르키예 아디야만의 한 이재민은 영국 스카이뉴스에 “(정부로부터)우리는 무시당하고 있다”면서 “이건 살인이나 다름없다”고 분노했다. 아디야만은 2018년 총선에서 집권 여당인 인민개발당이 70%의 득표율을 기록한 곳이다. 지진 피해를 입은 남동부 10개 주 가운데 6곳이 인민개발당이 우세한 지역이라고 한다. 튀르키예·시리아 국경 인근 하타이주는 “야당 우세 지역이라 정부의 구호와 원조가 더욱 늦어졌다”는 뒷말까지 나오고 있다.

FP는 1999년 8월 1만7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즈미트 대지진이 에르도안 정부에 일종의 데자뷔가 될 수 있다고 짚었다. 당시 민주좌파·공화인민당 연합의 뷜렌트 에제비트 총리는 지진 후속 조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했고, 고질적인 경제난 등이 겹쳐 국정 동력을 상실했다. 에제비트는 2002년 치러진 총선에서 에르도안의 인민개발당에 정권을 넘겨줬다. 에르도안이 총리·대통령 등을 거치며 20년 넘는 장기 집권을 한 계기가 된 선거였다.

지난 10일(현지시간) 구조 및 복구 작업이 진행되는 튀르키예 동남부 카라만마라슈 지진 피해 현장. 뉴스1

지난 10일(현지시간) 구조 및 복구 작업이 진행되는 튀르키예 동남부 카라만마라슈 지진 피해 현장. 뉴스1

이후 집권 여당인 인민개발당은 “국가 재건과 도시 개발”을 앞세우며 고층 빌딩, 교량, 쇼핑몰 등을 빠르게 조성하는데 주력했다. 2018년 내진 설계 등 규정을 지키지 않은 건축물에 대해 벌금만 받고 건축 허가를 내주는 ‘구역 사면’ 정책을 시행한 게 대표적이었다.

지진을 계기로 에르도안 대통령이 2019년 3월 지방선거 유세 현장에서 이 정책을 직접 홍보하는 동영상도 최근 소셜미디어(SNS)에서 확산하고 있다. 튀르키예 언론 두바르에 따르면 당시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지진으로 피해르 입은 남부 카라만마라슈를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의 ‘구역 사면’ 정책 덕분에 이곳 시민들의 거주 문제가 해결됐다”고 강조했다.

이스탄불 기술자연합위원회는 “최근 지진으로 타격을 입은 7만5000채의 건물이 에르도안 정부의 구역 사면 정책의 혜택을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번 지진이 “에르도안식 고속 성장의 대가”라는 평이 나오는 이유다.

이번 대지진은 ‘21세기 술탄’이란 별명을 얻은 에르도안의 장기 집권 가도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고 FP는 지적했다. 에르도안 정부는 “건축업자 131명이 대지진이 발생한 지역의 건물 붕괴에 책임 있다”며 113명에 대한 체포 영장을 신청하는 등 수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민심 이반을 잡을지는 미지수다. 현지 매체 TRT의 정치 분석가 유서프 에림은 “2월 지진 발생 이전의 지지율 조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대선을 치르는) 5월까지 모든 정당은 백지 상태로 돌아갔으며, 이 기간의 성과가 선거 결과를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12일(현지시간) 튀르키예와 시리아 국경 지역에서 규모 7.8의 강진이 발생한 이후 실종자 가족들이 무너진 건물 잔해 앞에서 불을 피워놓고 있다. AFP=연합뉴스

12일(현지시간) 튀르키예와 시리아 국경 지역에서 규모 7.8의 강진이 발생한 이후 실종자 가족들이 무너진 건물 잔해 앞에서 불을 피워놓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진 이전에도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렸던 튀르키예 경제는 이번 재난으로 더욱 악화할 전망이다. 지진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국내총생산(GDP)의 10% 규모인 841억 달러(약 107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추산도 있다.

튀르키예 응용연구센터의 시넴 아다르 박사는 “지금까지 에르도안이 강조했던 도시 개발은 물론이고, 국제 원조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서방에 맞서는 ‘강한 튀르키예’ 구도도 소용 없게 됐다”면서 “지진은 에르도안 집권 체제의 정당성(legitimacy)을 확실히 약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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