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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숙도 허문 '재난의 역설'…500년 적대국 그리스도 "돕겠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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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구조대원들이 6일(현지시간) 그리스 서부 엘레프시나 공군기지에서 군용기에 탑승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구조대원 21명, 구조견 2마리, 특수 구조 차량, 구조 엔지니어, 의사, 지진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구조 팀을 군용 수송기를 통해 튀르키예에 보낸다고 발표했다. AP=연합뉴스

그리스 구조대원들이 6일(현지시간) 그리스 서부 엘레프시나 공군기지에서 군용기에 탑승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구조대원 21명, 구조견 2마리, 특수 구조 차량, 구조 엔지니어, 의사, 지진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구조 팀을 군용 수송기를 통해 튀르키예에 보낸다고 발표했다. AP=연합뉴스

‘에게해(海)의 영원한 앙숙’
튀르키예(터키)와 과거 그 전신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점령당한 그리스 사이에 500년 가까이 이어진 적대 관계를 놓고 부르는 말이다. 한때 지중해 키프로스섬을 놓고 무력 충돌까지 갔던 두 나라 사이에 조금씩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6일(현지시간) 기준 36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튀르키예 대지진에 그리스가 ‘아낌 없는 지원’ 방침을 밝히고 나서면서다. 대지진이 낳은 ‘재난의 역설’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막대한 인명 피해를 부른 튀르키예 대지진에 국제사회의 지원 약속이 잇따르는 가운데 그리스도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는 이날 트위터를 통해 이번 튀르키예ㆍ시리아 대지진 피해자 유족들에게 애도를 표한 뒤 ”그리스는 자원을 동원해 즉시 지원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6일(현지시간) 튀르키예와 국경을 인접한 시리아 북서부의 베스니아 마을에 지진이 발생한 뒤 guswl 주민들이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희생자와 생존자 구조 작업을 벌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6일(현지시간) 튀르키예와 국경을 인접한 시리아 북서부의 베스니아 마을에 지진이 발생한 뒤 guswl 주민들이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희생자와 생존자 구조 작업을 벌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튀르키예와 그리스는 24년 전인 1999년에도 대지진 발생 후 화해 무드를 꽃피운 적이 있다. 1999년 8월 튀르키예 서북부 이즈미트와 이스탄불을 강타한 지진으로 1만7000명 이상이 숨지는 참사가 있었다. 자고 나면 수천 명의 사상자가 늘어났던 대참사에 그리스가 발벗고 나서 재난 극복을 도왔다. 구호품과 구조대원을 즉각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구호ㆍ지원에 나선 것.

그로부터 한 달 뒤엔 그리스 아테네 부근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미국 콜로라도 국립지진정보센터에 따르면 아라비아판ㆍ아나톨리아판ㆍ아프리카판 등 세 개의 지각판이 만나는 튀르키예와 그리스는 지질학적으로 ‘지진의 핫스팟’이다. 당시 아테네 지진은 사망자 수가 140여명으로 이즈미트 대지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피해 규모가 작았지만, 튀르키예 역시 구조대원을 급파해 그리스의 지원에 보답했다. 특히 튀르키예가 당시 파견한 비정부단체(AKUT) 구조대는 그리스에서 가장 적극적인 구조 활동을 편 것으로 평가됐다. 양국 간 인류애가 세상을 놀라게 한 셈이다.

튀르키예 지역 역대 주요 지진 현황. 연합뉴스

튀르키예 지역 역대 주요 지진 현황. 연합뉴스

튀르키예와 그리스는 이를 계기로 양국 친선 축구대회를 열고 이스탄불 시장과 아테네 시장이 만나 폭넓은 협력협정을 맺는 등 해빙 무드를 이어갔다. 당시 국제사회는 이를 ‘지진 외교(earthquake diplomacy)’라 부르며 양국간 화해 노력을 의미 있게 평가했다.

이번 튀르키예 대지진 후 그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가입 문제로 갈등을 겪어 온 스웨덴과 핀란드도 희생자에 애도를 표하고 즉각적인 지원 의사를 밝혀 눈길을 끌었다.

늘상 다투던 나라가 지진 등 대규모 재난을 거치면서 가까워지고 화해 무드로 돌아선 사례는 과거에도 곧잘 있었다. 2005년 10월 인도-파키스탄 영토 분쟁 지역인 카슈미르에서 대지진이 났을 때도 그랬다. 당시 파키스탄 쪽 피해가 특히 심각해 약 8만명의 사망자와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카슈미르 국경통제선에서는 파키스탄 병사들이 매서운 추위 속에 노숙을 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그러자 인도 군인들이 국경통제선을 넘어가 파키스탄 군대의 벙커 복구 작업을 도와 화제가 됐다. 과거엔 선만 넘어도 유혈 사태가 벌어졌을 곳인데, 처참한 대재난이 역설적으로 양측 사이 적대감을 누그러뜨린 것이다.

2003년 11월 이란 케르만주의 한 도시 밤(Bam)에서 지진이 발생하자 앙숙 관계인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구호 활동에 나서며 경제제재를 일시적으로 푼 일도 있다. 당시 이란의 개혁파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은 “미국의 지원에 감사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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