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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사건 백서」 만들라/유승삼(중앙칼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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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여섯살의 서연양을 생매장한 범인은 그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다시 되묻는 기자질문에 마치 무슨 결백이라도 증명하려는 듯한 투로 이렇게 말했다.
『진짜 산채로 파묻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모른 척하고 그대로 땅에 묻었다는 설명도 서슴없이 했다. 이어 그는 『잡히지 않을 수 있었는데 잡혀서 분하다』는 말까지 했다.
범인의 이런 태연한 답변과 태도를 접하면서 우리들이 지녔던 아직도 풀 수 없는 의문은 과연 무엇이 그에게서 마지막 한 가닥의 인간성이나 죄의식마저 앗아가 버렸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인간으로 태어났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이 19세기라면 몰라도 오늘날에 와선 범죄가 유전적인 것이라거나 선천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범죄란 결국 사회구조적 산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범죄는 인간이 가정과 사회라는 환경과 대응하는 과정에서 잉태된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범죄의 유전적 요소나 선천성을 부인하는 한 이런 지적에 일단 동의할 수 밖에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지적이 합당하다고 여겨지면서도 그것이 너무도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어서 당면한 위험을 방지하는 데는 그 어떤 현실성 있는 처방도 제시해 주지 못한다는데 있다.
우리들은 무엇을,어디에서부터,어떻게 시작해야할 것인가. 우리들에게 절실한 것은 범죄를 낳는 요인을 좀더 구체적으로 밝혀내 그에 대한 실효성 있는 처방을 서두르는 일이다. 비록 그것이 많은 비용과 오랜 시일을 필요로 할지라도 그 정확한 원인과 적절한 처방을 알 수만 있다면 우리들은 거기에 힘을 집중시킬 수 있을 것이고 문제해결에 한걸음씩이나마 접근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잔혹한 범죄사건을 겪을 때마다 늘 아쉬운 것은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응은 번번이 감정적 테두리 안에서만 맴돌고 만다는 점이다.
사건이 나면 사람들은 다투어 비인간적 범행과 타락한 세태를 개탄하고 무능한 경찰을 꾸짖으며 끝내는 권력의 부도덕성에까지 화살을 겨눈다.
잔혹한 범죄에 대한 우리들의 증오감이나 타락한 세태에 대한 개탄이 잘못된 일일 수는 없다. 또 무능한 치안당국이나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권력에 대한 우리들의 꾸짖음이 빗나간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다만 그것에서 그쳐버린다면 감정의 발산은 가능할지언정 그것이 발등의 불인 범죄에 대한 처방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요구하고 있고,그래서 현재 정부가 펼치고 있는 「범죄와의 전쟁」도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역시 감정적 차원의 대응에 지나지 않는다.
당국과 마찬가지로 적지않은 국민들도 범죄자들을 붙잡아 가능한한 오랫동안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고 믿고 있다. 범죄자의 수가 고정불변이라면 그러한 방법은 분명히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범죄자를 낳는 사회적 조건이 엄존하고 그래서 그것이 끊임없이 새로운 범죄자를 탄생시킨다면 그러한 중형주의의 효과도 결국은 일시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의 길은 멀고 범죄의 위험은 바로 옆에까지 다가와 있기에 당장의 위험을 방지해줄 강력한 치안체제의 확립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범죄를 낳는 사회적 조건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밝혀내는 일이다.
언제까지 개탄만 하고 있을 것인가. 현재와 같은 경찰의 비상체제를 과연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양평사건의 범인들은 당연히 법의 엄한 단죄를 받겠지만 그것이 그들이 저지른 것과 같은 범죄가 되풀이 되지 않게하는데 과연 얼마나 이바지할 것인가.
우리들이 범죄자를 검거하고 그를 법정에 세우는 것이 단지 그의 반사회적 행위를 응징하고 끝내 버리자는데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엄한 단죄보다 더 효과적이고 사회에 필요한 것은 그들이 왜 어떻게 해서 범죄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가를 다각적으로 분석해 그로부터 교훈과 처방을 얻는 일이지 않을 수 없다.
양평사건 범인들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가. 부모는 어떤 사람들인가. 가정의 경제적 능력은 어떠했는가. 무엇이 가장 큰 불만이었는가. 그들은 자기들 자신을,타인을,사회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사람을 생매장하고도 태연할 수 있는 심성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이번 사건의 범인들에 대해서만 해도 의문은 끝없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들을 경찰이 모두 풀어주기를 기대할 수는 물론 없다. 우리 경찰의 현 여건이나 수준으로는 범죄자를 잡는 것조차 힘에 겨운 형편이다.
양평사건에서 우리들이 범죄를 일으키는 사회적 요인들에 대한 어떤 단서를 얻으려면 단순히 그들을 처벌하고 말 것이 아니라 사회학자·교육학자·정신분석의·경제학자·범죄전문가 등 우리 사회의 지적 능력을 총동원하여 학구적 자세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유형별 범죄에 대한 이러한 연구성과들을 모아 보고서를 만들면 과연 무엇이 끊임없이 범죄를 낳고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는 우선 양평백서를 만들라. 범죄와의 전쟁에서 진실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무거운 형벌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지적 대응을 통해 문제의 핵심에 접근해 가는 데 있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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