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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본 떼도 당했다"…3493채 '빌라신' 사기, 그뒤엔 '2400조직' [빌라왕 전성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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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전세 사기를 벌인 혐의로 지난 10월 구속기소된 권모씨는 피해자와 부동산 업계 관계자들로부터 ‘빌라의 신(神)’이라 불린다. 그와 일당이 보증금을 가로챈 것으로 의심되는 전세 주택 규모가 무려 3493채나 되기 때문이다. 빌라의 신에 이어 빌라왕(王)'도 등장했다. 1139채나 되는 빌라·오피스텔 전세를 내준 뒤 최근 사망한 김모씨다. 그보다 전에는 기소된 것만 136명의 보증금을 가로챈 ‘화곡동 세모녀 전세 사기’ 사건이 공론화되기도 했다.

 모두 집값·전셋값 차이가 적은 주택을 매입한 뒤 전세금을 올려서 차익을 노리는 일명 ‘무자본 갭 투자’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경찰은 권씨 배후에 전문적인 전세 사기 조직이 있는 것으로 보고 수사 중이다. 권씨 외 김씨 사건 등에서도 비슷한 조직범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경기남부경찰청은 일명 '빌라의 신'으로 불린 권모씨 사건 관련 배후에 또 다른 범행 가담자가 있다고 의심하며 분양대행업체 관계자 등 180여명을 사기 등 혐의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선상에 올렸다. 사진은 경기남부경찰청 청사의 모습. 연합뉴스

경기남부경찰청은 일명 '빌라의 신'으로 불린 권모씨 사건 관련 배후에 또 다른 범행 가담자가 있다고 의심하며 분양대행업체 관계자 등 180여명을 사기 등 혐의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선상에 올렸다. 사진은 경기남부경찰청 청사의 모습. 연합뉴스

 남구준 국가수사본부장은 지난 10월4일 기자간담회에서 권씨 사건에 대해 “자기자본 없이 주택을 매입하는, 무자본 갭 투자 방식의 전국 최대 규모 전세 사기”라며 언급했다. 검찰은 지난 10월27일 우선 세입자 20명의 보증금 43억7000만원을 가로챈 혐의로 권씨와 공범 등 3명을 구속기소 했다.

 그런데 빌라의 왕 배후엔 더 큰 조직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권씨 일당의 전세 사기 범행 피해자들을 대리하고 있는 법무법인 제하 측은 이 일당을 이른바 ‘2400조직’으로 지칭하고 있다. 권씨와 그의 공범, 범행의 주범으로 의심되는 이들이 모두 뒷자리가 ‘2400’으로 통일된 번호의 대포폰을 사용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경찰 관계자는 “구체적인 수사 상황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지만, 2400이라는 숫자와 피의자들 사이 연관성도 경찰의 조사 대상인 것으로 파악됐다.

신(神)도 왕(王)도 잇따라 적발…가족 동원 범행도

 최근에는 ‘빌라왕’ 40대 임대업자 김모씨 사건이 논란이 됐다. 김씨는 지난 2020년부터 올해까지 수도권에서 1139채의 빌라와 오피스텔 등을 매입해 세입자들에게 임대한 것으로 파악됐다. 권씨와 같은 무자본 갭 투자 수법으로 전세 사기를 저지른 혐의점이 경찰에 포착됐고, 김씨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의 수사 대상이 됐다. 그러나 김씨는 지난 10월12일 서울 종로구 소재 한 숙박업소에서 숨진 채 발견됨에 따라 ‘공소권 없음’ 결정이 내려졌다.

 이전에는 가족을 동원한 전세 사기 범행이 적발되기도 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부장 김형석)는 임대업자 김모씨를 비롯해 분양대행업자 2명을 사기 등 혐의로 구속기소 했다고 7월11일 밝혔다. 이 중 임대업자 김씨는 무자본 갭 투자 방식으로 136채가량의 빌라 소유권을 취득한 뒤 이를 자신의 30대 두 딸 명의로 이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파악됐다. 이런 방식으로 임차인 136명의 298억원 상당의 임대차 보증금이 이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는 게 검찰 판단이다. 검찰은 지난 1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서 김씨에 대해 징역 8년을 구형했다. 김씨 두 딸도 부동산실명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상태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세입자들 속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보험 된대서”

 빌라의 신, 빌라왕 등의 전세 사기 범행에 세입자들은 왜 속을 수밖에 없었을까. 이들로부터 전세 사기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세입자들은 계약 당시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보증금 보험 가입이 가능하다고 안내를 받았고, 등기부 등본 등 서류들도 문제가 없어 보였다고 입을 모은다.

 수원 파장동 소재 다세대주택 세입자 배모(27)씨는 “(전세보증금반환) 보증보험 가능하단 말을 듣고 집을 선택했다”며 “계약서도 표준임대차계약서대로 돼 있어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경기 수원 소재 빌라 세입자인 A씨(39)는 “등기부 등본을 처음 떼 봤을 때 (문제없이) 깨끗했다”며 “잔금 치른 날 애초 계약했던 건축주에서 (빌라왕) 김씨로 매매가 이뤄진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다”고 토로했다. A씨는 이런 일련의 과정으로 최근 유산의 아픔을 겪었다고 전했다.

 경찰 및 피해자 측 변호인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전세 사기 범행 일당은 수백채의 빌라 등을 취득한 다음 매매가보다 높은 전세금을 매기는 일명 ‘깡통 전세’ 수법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거래량이 적어 시세가 불분명한 매매가 2억원짜리 신축 빌라 등을 매입한 뒤 2억원보다 더 많은 전세보증금을 세입자들로부터 받는 식이다.

 전세 사기 일당은 계약 당일 또는 직후에 계약서상의 집주인을 바꾼 뒤 계약 종료 기한이 다가와 보증금 반환을 요구하면 “돈이 없다”고 버텼다는게 세입자들의 설명이다. 이들은 세입자에게 돈을 더 내고 집을 사라고 요구하거나 새로운 세입자를 “알아서 구하라”는 식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집을 경매로 넘기려 해도 낙찰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보증금 전액을 그대로 돌려받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주택세입자 법률지원센터 ‘세입자114’의 이강훈 변호사는 “경매가 진행되면 이런 매물의 경우 경기가 좋지 않거나 하면 (원금의) 75~80% 수준에서 거래가 된다”며 “보증금을 그대로 못 돌려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집주인의 세금 체납으로 건물이 압류되면서 보증금을 전혀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한다고 한다. 빌라왕 김씨의 경우 종합부동산세 62억여원을 체납한 상태에서 숨졌다. 4촌 이내 친족이 상속을 해야 HUG의 대위 변제가 가능한데, 친인척들은 상속을 꺼리고 있는 상황이다.

 HUG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전세보증보험금 사고가 발생해서 HUG가 집주인 대신 세입자에게 전세 보증금을 지급한 건수와 변제액은 ▶2018년 372건·792억원 ▶2019년 1630건·3442억원 ▶2020년 2408건·4682억원 ▶2021년 2799건·5790억원 ▶2022년(10월말까지) 3754건·7992억원에 달한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전세금을 날릴 상황에 처한 세입자들이 집주인을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서보지만, 서류상 집주인은 명의만 빌려준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많다. 검찰은 ‘신’이라 불렸던 권씨도 주범이 아니라 함께 재판에 넘겨진 최모씨가 범행을 주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더 나아가 경찰은 권씨와 최씨 뒤에 실제 이익을 거둔 이들을 따로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경기남부경찰청 반부패범죄수사대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분양대행업체·부동산 공인중개사 등 180여명을 사기 등 혐의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 중이라고 18일 밝혔다.

빌라왕 김씨의 경우에도 경찰은 김씨가 지적장애를 앓고 있던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을 파악했다. 이때문에 경찰은 실제로 김씨가 아닌 다른 주범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씨와 직접 계약을 한 경우 외에 제3의 인물이나 공인중개사 등이 계약 체결 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정황이 포착됐다.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 관계자는 “건축주 및 공인중개사 등 공범들에 대한 수사를 계속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청 관계자는 “무자본 갭 투자 전세 사기 범행은 조직적으로 이뤄지며 단독으로 (범행)하기에는 힘든 구조”라고 짚었다.

“예방이 최우선…정보 제공 등 제도 개선해야”

전문가들은 이러한 형태의 전세 사기 범행은 현행 제도를 악용한 것으로 보고, 개선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김인만 부동산경제연구소 소장은 “범죄 적발보다 ‘예방’이 최우선”이라며 “임대차 계약이 진행될 때 임대인의 세금 체납 여부 및 보유 주택 수 등 관련 정보를 의무적으로 세입자에게 제공토록 하거나 (임대차 계약 시) 보증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는 등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김진유 경기대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는 “개인의 보유주택 수가 일정 수를 넘어갈 경우 신고 및 허가를 받게 하도록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며 “경찰력·행정력을 동원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제도 개선”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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