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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뺏길지 모른다""집주인 연락 안돼" 매일 고성 터지는 이곳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대표적인 전세 사기라고 주위에서 그러더라고요….”
김모(41)씨는 지난해 3월 경기도 부천의 한 빌라에 입주했다. 전세금 2억 7000만원에 계약 기간 2년. 육아에 도움을 받기 위해 부모님 댁 근처 집을 찾다가 발견한 매물이었다. 그런데 그해 여름부터 미심쩍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에어컨을 고치기 위해 집주인에게 연락했지만, 신호가 가지 않았다. 계약을 중개한 부동산에 문의하니 집주인이 A씨로 바뀌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부동산에서 받은 번호는 착신금지 상태였다.

부동산에서 수리 비용을 지불했지만 찜찜했다. 경찰과 함께 매매계약서에 기재된 A씨의 집 주소로 찾아갔지만 “오래전 아들과 절연했다”는 A씨 아버지의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뚜렷한 피해가 없어 수사 의뢰는 하지 않은 채 지내오던 김씨는 최근 부동산업계 지인으로부터 “부동산과 전 집주인이 현 집주인 명의를 빌려 저지른 사기행각일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실제 사기라면 자칫 전세금을 되돌려받지 못할 수는 있는 상황. 김씨는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황스럽다. 지원센터에선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15일 전세피해지원센터엔 상담을 예약한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지원센터엔 일 평균 26명이 방문한다고 한다. 신윤정 인턴

15일 전세피해지원센터엔 상담을 예약한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지원센터엔 일 평균 26명이 방문한다고 한다. 신윤정 인턴

지난 15일 오후 2시쯤 서울시 강서구의 한 건물 2층엔 드문드문 인파가 이어졌다. 7개 창구에 자리한 직원들은 두꺼운 서류 뭉치를 넘기며 마주 앉은 방문객의 민원을 처리하고 있었다. 대부분 예약상담자로 김씨처럼 전세사기 피해가 의심된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대면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사기 피해를 호소하는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 순서를 기다리던 한 중년 여성은 “돈을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 이 집에서 나가고 싶다”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영하의 날씨에 갑작스러운 폭설까지 내렸지만, 방문객의 발길은 마감 시간인 오후 5시까지 이어졌다.

전세사기 피해 대응 위해 출범 

서울 강서구 전세피해지원센터는 상주하는 주택도시보증공사 직원 4명과 비상주인 협력기관 법률전문가 등 5명이 업무를 처리한다. 신윤정 인턴

서울 강서구 전세피해지원센터는 상주하는 주택도시보증공사 직원 4명과 비상주인 협력기관 법률전문가 등 5명이 업무를 처리한다. 신윤정 인턴

전세사기 피해자의 호소가 쏟아진 이곳은 이날로 출범 79일째를 맞은 전세피해지원센터(지원센터)다. 정부가 지난 9월 1일 내놓은 ‘임차인 재산 보호와 주거안정 지원을 위한 전세사기 피해 방지안’에 따라 같은 달 28일 주택도시공사(HUG)가 만든 곳이다. 최근 임대차 계약이 끝났는데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전세 피해가 늘고 계약정보가 부족한 임차인을 노린 악의적 전세사기가 증가한 데 따른 조치다. 경찰청에 따르면 전세 사기 관련 검찰 송치 건수는 지난 2020년 97건에서 지난해 187건으로 증가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지난 9월 전세보증금반환보증보험 보증사고 건수와 금액은 각각 523건, 1098억원으로 집계됐다. 2013년 9월 해당 상품 출시 이후 각각 역대 최대치다. 전세보증금반환보증보험은 집주인이 계약 기간 만료 후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면 보증기관이 대신 보증금을 가입자(세입자)에게 지급하고, 나중에 집주인에게 구상권을 청구해 받아내는 상품이다.

피해 규모가 커졌지만, 피해자들이 법적 대응방안을 알지 못해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지원 창구가 흩어져 있다는 점도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법률지원 ▶긴급주거지원 ▶긴급금융지원 ▶사기 의심사례 접수를 총괄하는 지원센터가 출범했다. 전세 사기 피해가 집중된 서울 강서구에 자리를 잡았다.

민주당 허종식 의원실이 HUG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개소 후 지난달 말까지 1068명이 지원센터를 찾았다. 모두 법률상담을 받았는데 이 중 69명은 긴급주거지원 상담으로 이어졌다. 현재까지 6명이 6개월간 임시거처를 받았다. 경매 중인 강제관리주택을 전세피해자에게 임시거처로 제공하고 임차료(입주자가 30% 부담)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지역별로는 서울이 585건(55%)으로 피해 접수 비중이 높았고 인천 18%, 경기 16%가 뒤를 이었다. 국토교통부가 최근 공개한 통계에 따르면 인천 미추홀구(53건·21%)는 서울 강서구(60건·9.4%) 다음으로 보증사고율(전세계약이 끝난 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비율)이 높았다. 피해접수 연령별로는 30대(52%)가 절반 이상이었고 연립·다세대(64%) 피해가 가장 컸다. 피해 규모는 2~3억 원대(37%) 비중이 높았다. 사기의심 사례 중엔 무자본 갭투기(63%)가 많았다. 집값과 전세값 차이가 적은 주택을 사들인 뒤 전세금을 올려 차익을 노리는 방식이다.

피해자들, 집단소송 원하지만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 모여 피해사실을 공유하고 대응방안 등을 논의한다고 한다. 신윤정 인턴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 모여 피해사실을 공유하고 대응방안 등을 논의한다고 한다. 신윤정 인턴

지원센터 관계자는 피해자 중 집단소송을 원하는 이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지원센터엔 사기 의심 사례들이 잇따라 접수됐는데 자본 갭투기꾼으로 추정되는 권모씨와 수도권에서 1139가구에 달하는 빌라와 오피스텔을 임대해 ‘빌라왕’으로 불린 김모씨에 관련된 피해 신고(42건)가 많았다고 한다. 16일 전세피해지원센터를 찾은 김모(25)씨는 “오픈 채팅방을 중심으로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모여서 대응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원센터 차원에서 집단소송 지원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피해 규모와 재산 수준이 피해자마다 달라서다. 대한법률구조공단은 기본적으로 소득이 기준 중위소득의 125% 이하일 경우 법률구조대상자로 본다. 지원센터 관계자는 “대한법률구조공단과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질적인 피해자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허종식의원은 지난 12일 공인중개사법과 부동산 등기법·주택 임대차보호법을 일부 개정하는 일명 ‘전세피해방지 3법’을 대표 발의했다. ▶공인중개사의 임대 정보 요구권 신설 ▶지방세, 국세 등 체납내역을 등기부등본에 기재 ▶전세피해 방지를 위한 국가와 지자체의 역할과 지원을 법으로 규정하는 게 뼈대다. 허 의원은 “전세 피해가 늘고 있어 정부 대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종합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전세피해방지 3법을 발의했다. 임차인 권리 강화 등 서민 주거 안정에 힘쓸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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