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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미선' 강철멘탈 "간절했던 배역 못 받은 아픔, 돌아보니 행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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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발레리나 강미선. 지난해 10월 출산 후 거의 바로 현역에 복귀했다. 지난 5일 중앙일보와 인터뷰 직후 광진구 유니버설 발레단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발레리나 강미선. 지난해 10월 출산 후 거의 바로 현역에 복귀했다. 지난 5일 중앙일보와 인터뷰 직후 광진구 유니버설 발레단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미선이라면 해낼 겁니다.”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UBC) 단장이 지난 3월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강미선 수석 무용수가 지난해 10월 출산 뒤 약 8개월만인 6월, ‘잠자는 숲속의 미녀(잠미녀)’로 무대에 선다고 소개하면서다. ‘잠미녀’는 고전발레 4대 작품 중에서도 유독 주역 여성 무용수의 체력 소모가 많다. 불혹을 앞둔 데다 산고를 치른 뒤 1년이 채 안 된 대다수 무용수라면 도전장을 내밀기 쉽지 않다. 게다가 강 수석무용수의 ‘잠미녀’ 주역 무대는 이번이 처음. 그러나 문 단장은 그를 100% 신뢰한다고 확언했고, 강 수석은 무대에서 그 말이 실언이 아님을 입증했다. 강미선 무용수는 지난 5일 서울 광진구 UBC 연습실에서 중앙일보와 만나 “(‘잠미녀’ 주인공) 오로라로 무대에 서면서 20대 초반으로 돌아간 것처럼 떨렸고 감사했다”고 말했다.

강미선 수석무용수는 뛰어난 기량과 강철 멘털로 발레단 안팎에서 귀감이 되는 발레리나다. 장진영 기자

강미선 수석무용수는 뛰어난 기량과 강철 멘털로 발레단 안팎에서 귀감이 되는 발레리나다. 장진영 기자

이날 강미선 수석은 ‘호두까기 인형’ 리허설 직후 중앙일보와 만났다. 약 2시간을 뛰고 돌고 날아다닌 직후이지만 그 특유의 차분한 단아함이 빛났다. ‘호두까기 인형’은 매년 UBC의 인기 공연으로, 올해엔 지역 공연 성료 후 22~3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린다. 강 수석은 남편인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수석무용수와 함께 주역으로 춤춘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올해 UBC 근속 20년 기록을 세우셨고 지난달엔 ‘올해를 빛낸 무용수’로 수상도 하셨는데요.  
“여러모로 특별한 한 해였어요. 곧 마흔인데, 제 인생의 절반인 20년을 UBC에서 보냈다는 게 감회가 새롭습니다.”  
수석무용수 승급이 10년 전인데 올해 오로라로 데뷔했네요.  
“사실, 2012년 수석으로 승급하고 ‘잠미녀’ 공연이 있었어요. 캐스팅이 나왔는데 오로라 명단에 없어서 조금 놀랐어요. 수석이라고 꼭 주역을 하는 건 아니긴 하지만 속이 솔직히 상하긴 했어요(웃음). 오로라 역할 참 해보고 싶었거든요.”  
속상한 건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생각이라는 게 참, 한끗 차이더라고요. 내게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해내자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 주어진 게 파랑새 역할이었는데  오로라로 무대에 서진 못하지만 완벽한 파랑새를 보여드려서 관객께서 잊을 수 없는 무대를 만들어드리려고 했어요. 밤늦게까지 연습하다 불 끄고 집에 갈 정도로 열심히 연습했어요.”  
강미선 수석은 연습에 워낙 열심인 데다 멘털도 강해서 별명이 ‘갓미선’이죠.  
“속은 상했지만, 오로라에 더 맞는 이미지를 가진 다른 무용수가 있다면 제가 단장이나 감독이라고 해도 그 무용수를 기용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마린스키 발레단의 율리아나 로파트키나 수석무용수를 참 좋아하는데, 그분도 모든 배역을 다 춰본 건 아니니까요. 다양하게 제게 주어지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서 더 성장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캐스팅에 계속 연연했다면 힘들었겠죠. 돌아보면 다 복이고 행운이었습니다.”
오로라는 10대 소녀인데, 각오가 남달랐을 듯요.  
“걱정이 많이 됐어요. 그래서 (마린스키 발레단 출신) 마야 둠첸코 (UBC) 선생님께 지도를 요청 드렸죠. 선생님께서 ‘어려 보이려고, 천진하게 보이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추라’고 말씀해주신 게 큰 힘이 됐어요. 많이 떨렸지만 참 행복했습니다.”  

강미선 무용수의 다양하고도 단아한 포즈들. 장진영 기자

장진영 기자
장진영 기자
출산 후 복귀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적지 않은 나이이기도 해서 걱정이 겹쳤죠. 하지만 (손)유희나 (한)상이처럼, 후배 무용수들이 먼저 출산 후 멋지게 복귀해준 데서 용기를 얻었어요. (이현준 수석무용수와 부부인) 유희는 쌍둥이 엄마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솔직히 출산 후 무대에 서는 게 힘들긴 하더라고요(웃음). 골반도 굳고 허리도 예전처럼 꺾이질 않는 거예요. 꺾이지 않으면...별수 없죠. 연습해서 꺾어야죠(웃음). 스트레칭은 매일 꾸준히 하는 수밖에 없어요.”  
후배들이 유독 존경하는 무용수인데, 조언이나 당부가 있다면요.
“발레단 안팎에 오랜 기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어 주고, 기량을 갖추고 있는데도 무대 기회를 얻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참 안타깝습니다. 팬데믹 시기도 무용수들에겐 타격이 컸고요. 하지만 그래도 주저앉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문을 두드린다고 해서 모든 문이 열리진 않죠. 하지만 계속 두드리면 어느 문은 열리게 돼 있어요. 그 문을 통과하면 더 많은 문이 열릴 거에요.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호두까기 인형'은 유니버설발레단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다. 올해는 22일부터 31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린다. 위는 리허설 장면. 장진영 기자

'호두까기 인형'은 유니버설발레단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다. 올해는 22일부터 31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린다. 위는 리허설 장면. 장진영 기자

5년 후, 10년 후 강미선 수석 무용수는 어떤 무대에 서 있을까요.  
“저는 이제 나이도 그렇고, 더는 욕심을 부릴 때는 아니라고 느껴요. 가장 좋을 때 내려와야 한다는 걸 염두에 두고 있고, 천천히 내려올 준비를 하는 게 맞는 거 같고요. 하지만 일단은 지금 제게 주어진 무대가 있다면 계속 열심히 해나가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작곡의) ‘신데렐라’도 꿈의 작품 중 하나이고요.”  
아드님도 발레를 한다면?  
“(웃으며) 어우 글쎄요. 엄두가 잘 안 나긴 하네요. (아들) 레오가 엄마와 아빠의 춤을 기억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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